여자라 안 된대서 남자 됐지만…홀로 살아남은 그를 위한 변명 [스프]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 <언더독>의 부제는 '걔 말고 아니 걔도 말고 나머지 브론테(Underdog: The Other Other Brontë)'이다. 여기서 '걔도 아니고 걔도 아닌 나머지'는 앤 브론테다. 앤은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의 작가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의 막냇동생. '나머지'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두 언니만큼 유명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앤 역시 작가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맏언니 샬럿의 방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 연극의 화자는 샬럿이다.
세 자매가 안 된다면 세 형제가 되어
샬럿은 작가가 되고 싶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작가로 후세에 길이 남기 위해 필사적이다.
"나는 밀려나지 않을 거야. 그 방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거야. 디킨스, 새커리 (윌리엄 새커리.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 바이런과 함께 할 거야."
문제는 그녀가 시대를 잘못 타고났다는 데 있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 여성의 역할은 가사와 육아, 그리고 남편 내조에 한정되었다. 출판사에 문의해도 훈계 일색인 일장연설을 들을 따름이다.
"문학은 여성이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게다가 생계 문제가 그녀의 목을 졸랐다. 샬럿의 아버지는 가난한 성공회 사제였고, 어머니는 일찌감치 돌아가셨으며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 형제 브란웰은 알코올 중독으로 집안의 빚만 늘리고 다녔다. 직접 돈을 벌려고 해도 당시 여성이 손가락질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가정교사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샬럿은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가정교사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면초가다.
"우린 시작부터 빌어먹을 하위 장르라고!"
어떻게든 작가로 성공해야 하는 샬럿에게 자매들은 사실 경쟁자이기도 했다. 편집자가 에밀리와 앤의 소설을 선택하고 자신의 소설 <교수>는 거절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절망을 감출 수 없다. 그러므로 앤의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의 출판이 한없이 늦춰진 것은 샬럿에게 기회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앤은 상주 가정교사로 5년간 일하며 많은 부조리를 겪었다. 신분제도가 명확한 시대였기 때문에 앤은 주인집 식구들과 대등하게 친교를 나눌 수도, 하인들과 어울릴 수도 없었다.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주인집 아이들을 지도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어떠한 권한도 갖지 못했다. 앤은 이 간극에서 오는 모순을 자전소설의 형태로 생생하게 폭로하고자 했다.
그런데 샬럿이 뒤늦게 써온 소설 속 여주인공이 자신과 꼭 닮은 데다 직업마저 가정교사란 설정이다. 앤은 자신의 책이 나올 때까지만 <제인 에어>의 출판을 늦춰달라고 언니에게 애원하지만 돌아온 것은 변명뿐이다. 원래 작가들이란 늘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기 마련이라고, 책꽂이에 꽂힌 저 수많은 책들을 보라고. 앤은 항변한다.
"여자들 이야기는 다르지. 언니도 알잖아. 우리는 시작부터 빌어먹을 하위 장르라고!"
<제인 에어>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지만, 뒤이어 출간된 <아그네스 그레이>는 앤의 예상했던 대로 <제인 에어>의 아류로 평가절하된다. <제인 에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성' 작가가 아닌 '작가'로서 평가받고 싶다는 샬럿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다. 작가의 성별을 유추한 비평가들이 여성이 써서는 안 될 저속하고 교양 없는 책이라며 비판의 날을 세웠기 때문이다.
샬럿을 위한 변명
혼자 남은 샬럿은 작가로서 명성을 지키기 위해 넘지 못할 선이 없었다. 샬럿은 자신의 입맛대로 에밀리의 시집을 꼼꼼히 고친다. 심지어 출판 6주 만에 초판이 매진될 만큼 인기를 끌었던 앤의 마지막 소설 <와일드펠 홀의 세입자>가 재인쇄되는 것도 막는다. 알코올 중독과 가정폭력을 적나라하게 다룬 이 소설이 더 이상 앤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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