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의 공동체, 무정과 동정을 넘어 [역사의 뒤 페이지]

조형근 2024. 5. 12.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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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책을 만들지 못하는 동정, 희생자·피해자와 연대하지 못하는 연민의 한계는 뚜렷했다. 문제는 식민지에서는 그 동정과 연민마저 곧잘 금지됐다는 것이다.

정조 1년(1777년) 초여름 가뭄이 심했다. 정조의 일기 〈일성록〉 5월15일자에 가뭄 이야기가 나온다. 왕이 말했다. “어제는 비가 올 듯한 기미가 매우 다분했는데 끝내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 너무도 안타깝다. (중략) 천시(遷市, 시장 옮기기)는 몇 차에 행하는가?” 예조판서 홍낙성이 대답했다. “11차에 행한다고 합니다.” 왕이 한탄했다. “선조(先朝)께서 늘 중대하고 어려운 일로 생각하여 거행하지 않았었다.”

농경사회에서 가뭄은 심각한 위기였다. 통치의 기초가 흔들리는 재난이 될 수도 있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천시 또는 사시(徙市)는 가뭄이 극에 달했을 때 비를 기원하며 시장을 옮기던 풍습이다. 문헌상 기원이 오래다. 〈예기〉에 중국 춘추시대 진(秦)의 목공(BC 660∼BC 621)이 가뭄이 들자 현자(縣子)의 조언에 따라 저자(시장)를 옮겼다고 전한다. 한반도 최초의 기록은 신라 진평왕 50년(628년)으로,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 내리기를 빌었다”라는 기사가 〈삼국사기〉에 나온다. 별 효과는 없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려 자녀를 팔았다.”

1928년 7월21일자 〈동아일보〉 기사. 경북 상주 지역에서 당국이 한발(가뭄)에 고통받는 “백성에게 성의를 표하기 위하야 미신이나마” 시장을 옮긴다는 내용이 담겼다.

왜 하필이면 시장의 위치를 옮겼을까? 여러 해석이 있다. 대개 시장을 남쪽으로 옮기면서 동시에 양기가 들어오는 남문을 닫고 비와 결합되는 음기가 들어오는 북문을 연다는 점에서 음양사상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을 구름에 비유하는 언어 습관과 연결하면 일종의 유감주술(類感呪術)로 볼 수도 있다. 사회학적 해석도 가능하다. 시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므로 이를 옮기면 가뭄의 심각성을 알리는 극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실제로 비를 부르는 효과가 없음은 물론이다.

중종 때 학자 성현이 쓴 〈용재총화〉(1525)에서 시장 옮기기는 가뭄 대책 열한 가지 중 열 번째 대책으로 언급된다. 열한 번째 대책이 피전감선(避殿減膳), 즉 임금이 대궐을 피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며, 죄인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위의 〈일성록〉 기사에서는 천시가 11차라지만 차이를 따질 일은 아니다. 영조 8년(1732년) 6월의 실록 기사에서도 영조가 천시를 지시하는데 ‘피전감선’ 다음의 대책이었다.

영조의 사례를 생각하면, 선대의 왕들이 “늘 중대하고 어려운 일로 생각하여 (천시를) 거행하지 않았었다”라는 정조의 말은 부정확하다. 정조가 할아버지의 전례를 몰랐을 리 없다. 아마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정조만이 아니다. 조선의 임금들 마음이 대체로 그랬다. 세종 13년(1431년)에 가물자 왕이 말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기우할 때에 호랑이 머리를 용이 사는 못에 담그곤 하는데,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옛글에도 있으니 담그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기는 해야겠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취지다. 신하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실록과 관찬사서에는 이런 기사들이 많다.

도산은 왜 ‘다정한 사회’를 호소했을까

성리학은 비합리적 사변철학이라며 비난받곤 하지만, 당대의 잣대로 보면 꽤 합리적이고 실용적이었다.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을 믿지 않았다. 도교와 민간신앙에서 유래한 여러 제사를 형식과 규범에 어긋난 제사, 즉 음사로 본 이유다. 천재지변을 왕이 부덕한 탓이라고 믿지도 않았다. 속마음은 그랬지만 겉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왕들은 늘 자신의 부덕을 책망했다. 미신인 줄 알면서도 하늘에 기우제를 지내고 시장을 옮기며 음식을 줄이고 음악을 그쳤다. 홍수 때에는 기청제(祈晴祭)를 지내고, 역병이 돌면 여귀(厲鬼)에게 여제(厲祭)를 지냈다. 천재지변이 불가항력이던 시절, 백성들 앞에서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왕도 어쩔 수 없는 게 있었다.

1906~1907년경 조선을 방문한 독일 장교 헤르만 산더가 수집한 구한말 사진 자료. 당시 조선의 시장 모습이 담겨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일제하에도 천재지변은 여전했다. 이제 제사를 주관할 국왕이 없었다. 미신 척결을 내세우던 조선총독부가 나설 리 없었다. 다만 주민과 직접 접촉하는 지방 말단 권력의 입장은 달랐다. 뭐라도 해야 했다. 면장이나 군수들은 옛 왕조를 흉내 내며 산재한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시장을 옮겼다. 황당한 경우도 있었다. 1929년 여름, 전북 순창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발(가뭄)이 매우 심해 순창시장을 네 번이나 옮겼지만 비가 오지 않았다. 결국 군청, 경찰서, 면사무소가 8월6일부터 8월8일까지 사흘간 총출동해 인부 20여 명을 동원하고 주산인 금산에 올라 분묘 50여 기를 파헤쳤다. 분묘 훼손은 실정법이 엄금하는 미신 행위였는데, 당국이 앞장서 불법을 저지른 것이다. 재난이 얼마나 심각한 통치 위기로 인식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조형근, ‘시장 이전 기우제(徙市) 풍습과 식민권력의 한계지점’, 〈사회와 역사〉 80호, 2008).

전통사회에서 국왕은 세상의 초월적 중심이었다. 왕조가 무너지자 사람들은 마음으로나마 의지할 곳을 잃었다. 결국 서로 긍휼히 여기고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동정·연민이라는 새로운 감수성의 부상이다. 이광수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1918)은 일면식도 없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동정이라는 새로운 감수성을 부각시킨 작품으로도 주목받는다.

〈무정〉의 하이라이트는 삼랑진 수재 장면이다. 미국 유학길에 오른 형식과 선형은 부산행 기차 안에서 형식의 옛 정혼녀 영채와, 자살하려던 영채를 구한 신여성 병욱을 우연히 만난다. 이들은 일본으로 유학 가던 참이다. 서로 어색한 만남이다. 삼랑진에서 큰비를 만나 기차가 멈춘다. 기차 밖은 물난리가 끔찍했다. 시뻘건 강물이 넘쳐 집들이 잠기고 곡식과 가축, 사람들이 떠내려갔다.

“집을 잃은 무리들은 산기슭에 선대로 비를 함빡 맞아서 전신에서 물이 쭉 흐르게 되었다. (중략) 갑자기 퍼붓는 빗발에 숨이 막혀서 으아 하고 우는 아이도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머리에서 흐르는 빗물에 섞인 눈물을 흘리면서 몸을 흔들거린다.” 일행은 쓰러진 만삭의 임신부와 가족을 발견하고 여관으로 옮긴 후 의사를 불렀다. 경찰서장에게 허가를 얻어 역 대합실에서 즉석 음악회를 열었다. 이재민 구호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병욱이 말한다. “저희는 음악을 알아서 하려 함이 아니올시다. 다만 여러분 어른께서 동정을 주십사 함이외다.” 병욱이 바이올린을 켜고 영채와 선형이 노래를 불렀다. “그렇지 아니하여도 슬픔에 가슴이 눌렸던 일동은 그만 울고 싶도록 되고 말았다. (중략) 순박한 이 노래와 다정한 그 곡조는 마침내 일동의 눈물을 받고야 말았다.” 이렇게 눈물의 공동체가, 재난의 유토피아가 잠시간 출현한다. 왕 없는 세상을 대신하는 조선인 사회의 원형질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저널리스트 리베카 솔닛은 역사 속 대재난들을 검토한 저작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서 파괴적 재난 속에서 잠시나마 유토피아가 등장한다고 말한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며 오히려 강렬한 사랑과 기쁨, 연대의식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난은 비극이지만 평등해진 개인들이 서로 연결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이기적인 개인을 연결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바 있다.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또 다른 주저 〈도덕감정론〉에서 고통을 느끼는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에 주목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혹은 그렇게 상상하며 우리는 개인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사회 구성원으로 결속된다. 애덤 스미스는 묘비명에 〈도덕감정론〉의 저자로 기록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도산 안창호에게, 다정한 사회는 “조선 민족의 사활에 관계되는 문제”였다. “무정한 조선의 사회를 유정하게 만들어 무정으로 거꾸러진 조선을 유정으로 다시 일으키자”라고 호소했다. “우리 사회를 개조하자면 먼저 다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조선 적부터 무정한 피를 받았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더운 정이 없습니다. (중략) 일언일동(一言一動)에 우리 사이의 정의(情誼)를 손상하는 자는 우리의 원수외다”(섬메(안창호의 호), ‘무정한 사회와 유정한 사회’, 〈동광〉 1926년 6월호).

1934년 7월 삼남 지방 대수재가 일어난 뒤 이재민 구호 모습. 1934년 7월3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이다.

동정과 연민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타인에게 보이려는 위선이 되기 일쑤였고, 세상의 모순을 덮는 포장지가 되기도 했다. 성정이 뜨겁던 경성의전 부속병원의 의사 유상규가 동정심을 비난한 이유이기도 하다. 1934년 7월, 삼남지방에 대수재가 나서 사망 237명, 실종자·부상자 포함 676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23만명이 이재민이 됐다. 각지의 의사회가 참사 현장을 찾고, 사회단체들이 구호반을 조직했다. 언론사들은 대대적인 의연금품 모집에 나섰다. 아름다운 재난의 공동체가 펼쳐진 듯했다. 유상규의 생각은 달랐다. 신문사들이 두 달간 대대적으로 모은 의연금 누계가 부자들의 교외 별장 중 가장 작은 한 채 값에 못 미치고, 금광으로 떼돈 번 이들이 첩으로 들이는 기생 한 명 몸값이 못 되었다. 그저 요란스러운 위선이었다(유상규, ‘값싼 동족애’, 〈신가정〉 1934년 10월호).

대책을 만들지 못하는 동정, 희생자·피해자와 연대하지 못하는 연민의 한계는 뚜렷했다. 문제는 식민지에서는 그 동정과 연민마저 곧잘 금지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선 동정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1924)의 주인공 이인화는 “위선 없이 살지 못하리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위선임을 알면서도 동정을 갈구하던 시대, 서글픈 식민지였다.

세월호, 정치적 내전이 된 현대의 인재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해경이 지켜보고 텔레비전 카메라가 중계하는 가운데 304명이 사망·실종된 참사였다. 그리고 우리는 보았다. 엄혹하던 식민지 시절, 동정을 둘러싼 최소한의 고민조차 벗어던진 민낯의 폭력을. 그렇게 한국 사회도 침몰했다.

2014년 11월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노란 리본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사고 당일 밤 유족이 모인 진도체육관을 찾은 교육부 장관이 ‘황제 라면’ 사건으로 비난받자 청와대 대변인은 “계란을 넣은 것도 아닌데…”라며 반발했다. 4월17일, 해경 간부는 초기 대응이 미진하지 않았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해경이 못한 게 뭐가 있나?”라고 반박했다. 4월23일, 국가안보실장 김장수는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재난의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선언했고, 비서실장 김기춘은 7월10일, 이를 재확인했다. 국정원은 희생자 가족을 사찰했다. 7월14일, 대통령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로 경기가 침체된다며, “자칫 어렵게 살린 경제회복의 불씨가 다시 꺼질지도 모른다”라고 사회적 애도 분위기에 경고를 보냈다.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의 아들이 희생자 가족을 향해 “국민 정서 자체가 굉장히 미개”하다고 페이스북에 쓴 날이 고작 사고 이틀 후인 4월18일이었다. 4월20일, 한기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페이스북에 “북괴의 지령에 놀아나는 좌파 단체와 좌파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이 정부 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이라며 발본 색출해야 한다고 썼다. 극우 논객 지만원은 4월22일, “시체 장사에 한두 번 당해봤는가? 세월호 참사는 이를 위한 거대한 불쏘시개다”라고 주장했다. 곧이어 박상후 MBC 전국부장은 “뭐하러 거길 조문을 가. 차라리 잘됐어, 그런 X들 해줄 필요 없어”라고 막말을 했고, 한기총 부회장 조광작 목사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가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라고 비난했다. 유가족 김영오씨(유민 아빠)가 단식투쟁을 벌이던 2014년 9월에는 ‘자유대학생연합’이라는 단체가 2차에 걸쳐 폭식 투쟁을 벌였다.

침몰 이후 희생자 가족들은 오직 구조와 수습이 최우선이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도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을까 봐 극도로 몸을 사렸다. 참사 직후 희생자와 가족을 선제공격한 것은 정부와 우파의 돌격대였다. 거리낌 없이 정치적 내전을 벌였다. 식민지 시절 사람들의, 성리학자들의 고뇌를 흉내조차 내지 않았다.

수학여행 떠난 아이들이 돌아온다고 약속했던 금요일이 520번 넘게 지났다. 국가책임 인정과 사과, 피해자 사찰 및 조사 방해 행위 추가 조사 등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의 12개 권고 사항 대부분은 아직도 이행되지 않고 있다. 무정도 동정도 넘어야 한다. 동정을 넘어 해결로, 연민을 넘어 연대로 가는 길이 아직 멀다. 그 길을 포기할 수 없다며 다짐하는 말이 “잊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맹골수도에는 아직 물살이 거세고, 팽목항에는 바람이 여전하다. 세월호는 지금도 목포신항에 서 있다.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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