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싸움이 지난 뒤에도 거기 남은 사람들 [여여한 독서]

김이경 2024. 5. 12.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뒷자리〉
희정 지음
포도밭출판사 펴냄
ⓒ한성원 그림

제주 동백동산은 세상의 소란 속에서도 고요하다. 하늘을 가린 울창한 나무 사이를 걷는다. 다리가 무거워질 즈음 걸음을 멈춘다. 발아래, 굵은 철망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컴컴한 구멍을 바라본다. 도틀굴이다. 70여 년이 흘렀어도 생생한 공포. 저 구멍으로 들어갈 때의 심정을, 굴속에서 귀를 세우고 하루 한시를 천년처럼 보냈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끝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후 시간을 생각한다.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예전엔 싸움을 택한 이들의 시간을 생각했다. 그 치열함을 거울 삼아 살았다. 이제는 싸움으로 내몰린 이들의 시간을, 싸움 이후에도 삶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한바탕 싸움이 지나고 세상이 말짱한 얼굴로 돌아선 뒤에도 그 자리에 남은 이들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속된 호기심인 줄 알지만 살다 보면 간절히 그들의 안부가 궁금할 때가 있다. 기록 노동자 희정의 〈뒷자리〉를 펼친 이유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아카이브) 이후 희정의 글이라면 믿고 읽는다. 〈뒷자리〉는 10여 년간 이 땅의 싸움자리를 기록해온 그가 지난 흔적을 돌아보며 쓴 책이다. 한때 온 세상의 시선이 머물렀던 곳에서 여전히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기록한 책이다. 사건 이후가 궁금했던 내가 알고 싶은 이야기다. 해피엔딩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새드엔딩이냐면 그건 아니다. 엔딩이란 것 자체가 없다는 게 맞겠지. 한 사람의 삶엔 끝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삶들이 모인 역사는 다르다. 여기 기록된 삶들은 이미 역사가 되었고 여기엔 엔딩이 없다. 더 나은 엔딩을 만들려는 이들의 염원이 놓인 뒷자리만 있을 뿐.

대치 중인 전경들에게 밥을 먹이던 할머니

시작은 밀양과 화성 매향리와 경주 나아리 마을에 “여전히 남은 사람들” 이야기다.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해 할머니들까지 나선 싸움이 있었다. 도시의 불야성을 위해 왜 시골 노인들이 말년에 험한 꼴을 당해야 하는가, 기막혀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삶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았다. 10년 전 밀양을 찾은 젊은이가 그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소멸해가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기억할 게 너무 많아서, 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기억할 게 너무 많은 사회를 만든 것이 바로 이런 태도인 줄 알기에 변명할 수도 없다. 희정이 듣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과 무책임 사이에서 흔들리듯이 나는 읽는 사람으로서 책임과 무책임 사이에서 흔들린다. 뒤늦게 내 책임을 생각하며 희정이 기록한 〈뒷자리〉를 읽는다.

송전탑은 돈으로 “마을을 박살 내고” 들어섰다. 고소 고발이 이어지며 공동체는 파괴되고 사람들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래도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매일 송전탑을 바라보며 갈라진 이웃들과 함께 사는 이들이 있다. 얼마나 팍팍할까. 가늠되지 않는 절망감인데, 절망 속에서 희망의 숨통을 연 것은 또한 박살 당한 이들이다. 밀양 도곡마을 김말해 할머니는 “똥을 곁에 두고는 밥을 먹어도 사람을 곁에 두고 어케 밥을 먹겠냐”라며 자신들과 대치 중인 전경들에게 밥을 먹였다. 사람이니 사람에게 사람의 도리를 하는 마음, 그 마음이 지는 싸움, 소멸해가는 싸움을 계속하며 사람을 사람으로 살게 하는 힘이리라.

하나 사람으로 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사람답게 살고 싶은 꿈은 짓밟히고 입은 틀어막힌다.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무력감을 학습시키기 위해, 무력(武力)이 동원된다. 무력은 아무 소용 없다는 무력감을 먹고 자란다. 170여 가구의 작은 마을에서 30명 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화성 매향리에서 사람들은 그런 무력감과 싸워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희정은 말한다. “무력(無力)할 일은 많으나 싸워야 하는 일도 많다.”

월성원전 주민들은 지금도 매주 나아리 농성장에서 상여를 끄는 시위를 벌인다. 원전 때문에 몸에서 평균치 이상의 방사성물질이 검출되고 암 발생률도 44%나 높지만 책임을 묻는 주민들의 소송은 번번이 패한다. 삼중수소와 암 발병의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는 판결이 나온 날, 낼모레 팔십인 황분희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아 지친다고, 그러나 그만두지 않겠다고. “저 사람들 마음대로 할 수 없게 우리가 버텨주는 거잖아. 나는 잘하고 있는 거야.” 무너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잡으며 버티는 그이처럼, “내일 또 이 자리를 지키는 것 같은” 사소해 보이나 실은 엄청난 안간힘이 필요한 일이 한심한 세상을 돌려세운다는 걸 이 땅의 뒷자리들은 보여준다.

하고많은 후회로 잠자리를 어지럽히는 나는 후회 없이 살기를 꿈꿔왔다. 하지만 ‘후회 없이 살고 싶다는 말은 오만하다’라는 희정의 깨우침에 이르러 나는 기꺼이 그 꿈을 버렸다. 수많은 뒷자리를 좇으며 그는 그 자리에서 만난 이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작은 후회를 감수하며 사는 사람.”

그 말처럼 그가 만난 이들은 자신들의 잊힌 싸움을 기억하며 후회한다. 자신들의 싸움이 얼마나 중요한지 남기고 더 알렸어야 했다고.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싸운 걸 후회하진 않는다. “우리가 싸운 거 아무도 몰라” 하고 쓸쓸해하면서도 그들은 말한다. “설사 승리를 못하더라도, 아무것도 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뭐든 다 해봤어요. 저는 제가 기특해요. 잘했어. 기특해. 난 내가 너무 자랑스러워.”

지지 않는 마음으로 지는 싸움을 감당한 사람들을 보며 미래는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들이 연 미래가 올 때까지, 그들의 뒷자리가 맨 앞자리가 되는 날까지 버텨보자.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읽기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습관 [시사IN 구독]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