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텔 상해치사보다 섬뜩했던 수능만점자의 살인[의대생 사건 그후]①

김민수 기자 2024. 5. 12.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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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치사에서 계획 살인으로…더 교묘하고 잔혹해진 교제 폭력
'교제관계' 어떻게 설정해야 하나…피해자 법적 보호 장치 부족

[편집자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검거된 교제폭력 피의자는 1만3939명에 달한다.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는 교제폭력 사건 특성상 통계에 잡히지 않은 가·피해자는 더 많을 것이다. 강남역 의대생 살인 사건이 연일 주목 받고 있지만, 교제폭력 대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뉴스1>은 '의대생 사건' 이후 개선해야 할 교제폭력 실태를 집중 보도한다.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20대 남성 A 씨가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A 씨는 과거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의대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2024.5.8/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서울=뉴스1) 김민수 기자 = 여자친구를 숨지게 한 명문대 의대생의 살인 사건은 과거보다 극단적이고 교묘해진 형태의 교제 폭력이라는 분석이 많다. 과거 교제 폭력은 '우발적인 사건'이 다수였다면 최근 들어선 '계획적인 범죄'가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문제는 교제 폭력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아 정확한 피해 규모를 헤아리기 어렵고, 피해자를 위한 법적 보호 장치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교제 폭력은 진화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관련 대응 방안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의대생 교제살인은 과거 교제폭력과 무엇이 달랐나

교제폭력은 데이트를 하거나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 의사에 반해 상대방을 통제하고자 하는 강압적 태도나 행위다. 여기서 '관계'는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에 연애한 관계, 만남을 시작한 관계 등을 광범위하게 아우른다.

지난 6일 늦은 오후 서울 강남의 한 건물 옥상에서 의대생이 저지른 살인 사건은 교제 폭력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발생한 강력 범죄로 꼽힌다. 주목해야 할 것은 '계획범죄 정황'이다. 경찰에 따르면 피의자 최 모 씨(20대)는 범행 2시간 전 거주지(경기도 화성시 동탄 소재) 인근 대형마트에서 흉기를 구매한 뒤 피해자를 불러내 급소인 경동맥 부위를 20여 차례 찔러 살해했다. 이후 그는 피 묻은 옷을 갈아입었다. 최 씨 측은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 실질심사)에서 계획범죄임을 인정했다.

범죄심리 전문가인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과거 '교제 폭력'은 주로 폭력을 행사하다가 인명피해를 내는 치사 사건이 주류지만 최 모 씨와 같이 사전에 흉기를 구매한 후 치명상을 입혀 숨지게 한 극단적인 '계획범죄' 사건은 매우 드문 사례"라고 분석했다.

예컨대 지난 2021년 발생한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 상해치사 사건'은 교제폭력의 주된 양상이었다. 당시 오피스텔에서 30대 남성 A 씨는 여자친구와 말다툼하다 머리 등을 여러 차례 폭행해 숨지게 했다. '우발적인' 범죄로 해석할 수 있는 범죄다.

반면 최 씨의 경우 범행 전 마트에서 흉기를 구매하고 급소를 20여차례 공격했다. A 씨의 상해치사 사건보다 잔혹하고 지능적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수능 만점자이자 고학력으로 분류되는 '의대생' 최 씨의 성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범죄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지난해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서 30대 남성 B 씨가 자신을 교제 폭력 혐의로 신고한 40대 피해자를 흉기로 살해한 사건도 '계획범죄'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B 씨는 당시 피해자와 함께 자주 가던 피시방이 있는 건물 주차장에 숨어 있다가 습격했다. 또 여러 차례 피해자를 찔러 숨지게 했다는 점에서 극단적이다.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최근 가해자가 지속해서 자해하겠다고 위협하거나, 주변에 알리겠다는 등 교제폭력의 방식이 극단적이고 다양해졌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경찰의 대응이 점점 가해자에 대한 예방적 제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며 "피해자에 대한 신변 보호뿐만 아니라 가해자를 유치 또는 구속하는 등 엄정 대응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관련 통계 없고 특별법은 폐기 직전

해외에서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IPV)이라고 교제폭력을 명명한다. 한국에서는 과거 데이트 폭력이라고 부르다가 최근 들어 '교제 폭력'이라고 표현한다. 데이트 폭력에서 '데이트'라는 단어가 풍기는 낭만적인 어감으로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하기 때문이다.

검찰은 세계 여성의 날인 지난해 3월 8일 폭력범죄·교제폭력범죄 대응 방안을 발표하면서 "데이트 폭력이라는 표현은 공권력이 개입해 처벌해야 할 범죄의 심각성을 희석해 연인 사이에 발생하는 불미스러운 일로 가볍게 비칠 우려가 있다"며 '교제 폭력' 용어를 사용했다.

전문가들은 교제 관계의 범위 등을 어떻게 규정할지가 관건이라고 분석한다. 현재 '교제폭력'과 '교제살인'이 법적으로 규정된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의 '교제살인' 관련 통계도 없는 실정이다.

교제폭력은 현행 스토킹범죄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나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가정폭력처벌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접근금지 명령이나 가해자·피해자 분리 등이 불가능하다. 가해자의 피해자 주거지 접근 금지 등을 골자로 한 교제폭력 관련 특별법은 발의된 상태지만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21대 국회가 한 달도 남지 않아 폐기될 가능성도 작지 않다.

이건수 백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교제폭력과 교제살인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범죄 유형 등을 범주화해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며 "예를 들어 가해자가 흉기를 사용했는지 또는 괴롭힘이 얼마나 지속됐는지 등을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kxmxs410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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