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이 버린 이 남자… 하지만 그가 비웃은 이유는 [나쁜 책, 시즌2]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5. 11.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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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책, 시즌2] ① 가오싱젠 ‘탈출’
현대의 금서를 여행하는 [금서기행, 나쁜 책] ‘시즌2’입니다. 해로운 걸작, 불온한 명저, 필화를 겪은 세계의 금서를 여행합니다. 소장만으로 죽임을 당했던 책, 독재국가가 추방한 불온서적 등을 다룹니다. ‘금서의 역사’는 진행형입니다.
‘중국인 출신 최초’로 200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중국에선 모든 작품이 온통 ‘정부 지정 금서’인 불운의 작가 가오싱젠 모습. 그의 희곡은 1980년대 이후 중국에서 연거푸 상연이 금지됐으며, 중국은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반(反)중국적”이라며 비난했습니다. [국립대만사범대학(NTNU) 가오싱젠센터]
앳된 얼굴의 소녀가 피가 흥건한 자신의 배를 붙잡고 거리를 뛰어갑니다. 소녀의 복부는 피칠갑이어서, 마치 내장이 밖으로 쏟아진 것만 같았습니다.

소녀가 숨어든 곳은 버려진 시장의 허름한 창고였습니다. 어둠 속의 한 청년이 소녀 입을 틀어막습니다.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 그들(군인)이 올 것이다.” 소녀는 울부짖습니다. “제발 한 번만 비명을 지르게 해달라”고.

중국 출신 프랑스인 작가 가오싱젠의 1991년 작품 ‘탈출(Escape)’ 첫 장면입니다.

가오싱젠은 노벨상 수상작가입니다. 수상자가 발표됐던 2000년 10월, 중국 측은 “가오싱젠의 수상은 중국을 향한 모독”이라며 맹비판했습니다. 그 중심에 ‘탈출’이 자리합니다.

중국이 가오싱젠을 당(黨)에서 ‘공식 제명한’ 문제작, 그러나 되려 중국을 비웃으며 “난 이미 오래 전, 공산당을 탈퇴했다”며 맞받아쳤던 가오싱젠의 최대 문제작, 중국 금서 ‘탈출’을 여행합니다.

‘탈출(Escape)’을 비롯해 가오싱젠 희곡 두 편이 수록된 영문판 ‘Escape & The Man Who Questions Death’의 표지. 홍콩의 한 대학에서 2007년 출간한 책으로, 한국에서도 구매 가능합니다. ‘탈출’은 아직 한국어 번역판이 없어 원문으로 읽고 여러분께 전합니다.
두 눈동자 사이에 ‘총알’이 박혀 죽어버린 노인
가오싱젠 ‘탈출’은 희곡 작품입니다.

희곡이란, ‘무대 공연을 전제로 집필된 연극 대본’을 말하지요.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려면 ‘무대’를 상상해야 합니다. 폐허가 된 창고가 무대입니다. 우글거리는 탱크, 계엄군인의 기관총 때문에 소녀와 청년은 숨었습니다.

창고 밖 광장에선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소녀는 다행히 다친 건 아니었지만, 함께 도망치던 여성의 피가 튀는 바람에 온몸이 피범벅이었습니다. 둘은 창고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양철문을 열고 밖에 나갔다가는 총알이 날아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니까요.

소녀는 청년에게, 창고 밖 풍경을 반쯤 정신 나간 목소리로 설명합니다. “집 앞의 백합화분이 깨질까 걱정돼 잠시 문밖에 나왔던 노인은, 두 눈 사이에 총알이 박혀 죽었다고요….”

중국 인민해방군 의장대가 행진하는 모습. 인민해방군은 중국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당의 군대’입니다. [USAF·Myles Cullen·Wikimedia Commos]
이 작품의 배경이 중국이란 점과 ② 작품의 발표시점이 ‘1991년’이란 점을 기억한다면, 많은 분들이 눈치를 채시겠지요. ‘탈출’은 1989년 중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 ‘천안문사태(톈안먼사태)’를 배경 삼은 작품입니다.

천안문사태는, 중국 베이징 대학생들이 정부 부패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중에 육군이 탱크와 실탄을 사용해 진압하며 ‘사살’한 사건입니다. 헤비메탈에 맞춰 춤을 추며 “자유”를 외치던 대학생들은 난데없는 발포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이 총을 쏜 ‘6월 4일’은 지금도 중국에서 금지단어입니다.

가오싱젠 ‘탈출’에서 소녀는 마이크를 들고 ‘계엄법 반대’를 외치다 피신한 것이었고, 창고 안 청년 역시 대정부 시위에 가담했다가 쫓겨온 처지였습니다.그런데 ‘탈출’은 중국 정부의 학살을 비판하는 단선적인 작품만은 아닙니다. 저항문학 그 이상을 성취하려 하는데, 그래서 더 큰 문제작이지요.

왜 그럴까요. 좀 더 깊게 들어가 보겠습니다.

1989년 천안문사태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이 천안문광장에 탱크를 세우고 집결한 모습. 천안문사태 직후인 1989년 6월 11일 촬영된 사진입니다. 인민해방군은 ‘인민의 해방과 복지’를 위해 창설됐지만 천안문사태로 의미는 퇴색됐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AP·연합뉴스·매경DB]
“자유가 죽음을 낳는다면, 그 자유는 자살이다”
창고 안의 두 사람이 두려움에 떨던 때에, 한 중년 남성이 창고로 들어옵니다. 중년 남성은 아무 일도 몰랐다는 듯이 둘에게 묻습니다. “광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소녀와 청년은 급박한 상황을 설명합니다. 고무탄인 줄 알았더니 군인들이 진짜 총을 쐈다고, 나가면 죽을 수도 있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중년 남성의 태도가 좀 이상합니다. 그의 말은 스파이보다는 산책중인 철학자에 가까웠습니다. 중국 군인과 중국 정부를 옹호하는 것도 분명히 아닌데, 두 사람의 분노에도 동의하지 않는 겁니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대들이 한 일이란 ‘영웅적인 자살’에 지나지 않는군. 하지만 ‘자살’이란 점은 똑같아.” (‘중년 남성’의 말)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그의 주장은 이랬습니다.

1989년 6월 5일 촬영된 천안문사태의 상징과도 같은 ‘탱크맨’ 사진. 그는 탱크를 맨몸으로 막으면서 전날(6월 4일) 군인 총격 발포에 항의했습니다. 세계 민주화운동의 사진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진을 꼽는다면 바로 이 사진이겠지요. [로이터·연합뉴스·매경DB]
일단 ‘탈출’의 중년 남성은, 중국 정부의 진압사태를 옹호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 작품을 남긴 가오싱젠 자신도 마오쩌둥의 맹렬한 비난자였으니 ‘정부 옹호론’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이 ‘학살의 원인’이 된다면, 그런 민주화운동은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이 남성은 보는 겁니다. 목숨을 잃었을 때의 승리는 아무 의미도 없으며, 죽음으로 귀결되는 열정은 맹목적일 뿐이란 지적이 뒤따릅니다.

“…자유가 죽음을 낳는다면 자유는 자살에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을 때 최후의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지? 진실은, 너나 나 둘 다 우리의 삶을 위해 달려야 한다는 거야. 죽음 앞에서 맹목적인 열정은 헛된 거니까.” (‘중년 남성’의 말)

청년은 중년 남성에게 즉시 대노합니다.

“…이보세요, 그러면 민주화운동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겁니까? 도시 전체가 학살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할 것이고 투쟁은 더욱 치열해질 거라고요. 하루빨리 학살의 진실을 밝혀야 하고, 그 항의를 전국으로 확산시켜 노동자와 학생의 총파업을 촉구해야 합니다. 곧 내전(內戰)이 일어날 거예요!” (‘청년’의 말)

하지만 중년 남성은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 “…뭐, 내전이라고? 농담하지 마. 학생들을 이용해 카드로 이용하는 것이 지겹지도 않은 거야? 어떤 일이 어떻게 끝날지 생각하지 않고 시작에만 관심을 갖고, 후퇴를 조직하지 않은 채 공격만 하는 사람은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 돼. 이 게임에서 그대들은 희생양이 될 뿐이니까.” (‘중년 남성’의 말)

그 결과, 화를 참지 못한 청년이 양철문을 열고 창고를 나가버립니다. 그때, 한 발의 총성이 울립니다. 소년과 중년 남성은 청년이 사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국기 오성홍기와 천안문광장의 모습. 수도 베이징을 상징하는 중국의 가장 유명한 광장입니다.[Morio·Wikimedia Comons]
그러나 다음날, 청년은 멀쩡한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총성은 청년을 겨냥한 것이 아닌, 개를 향해 쏜 군인의 총소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청년의 표정이 어제와 다릅니다. 문제는 군인이 아니었던 겁니다. 청년이 두 눈으로 확인한 새벽의 광장은, 어제의 참혹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군집한 시위대가 정의와 미래를 선언했던 광장, 군인의 총격으로 죽음의 시체와 더러운 쓰레기와 소름 끼치는 비명이 마구 뒤엉켰던 어제의 광장은, 마치 전날 ‘아.무.일.도.없.었.다.는.듯.이’ 말끔하게 청소됐던 겁니다. 광장은 사람들이 평화로이 걸어 다니는 평범한 출근길일 뿐이었습니다.

창고 안에도 아침이 밝아옵니다. 지붕 틈새로 햇살이 내려옵니다. 그 햇빛이 세 사람이 고립됐던 창고 안 웅덩이를 비추었을 때, 그것은 ‘물웅덩이’가 아닌 ‘피(血)웅덩이’였습니다.그것은 누구의 피였을까요. 세 사람은 웅덩이에 둘러앉아 고개를 푹 숙입니다. 무대는 막을 내립니다.

가오싱젠 ‘탈출’에는 창고 귀퉁이의 물웅덩이가 반복 서술됩니다. 아침이 밝았을 때 세 사람(소녀, 청년, 중년 남성)이 본 건 물웅덩이가 아닌 피웅덩이였습니다. 광장이 저리도 말끔히 치워졌다면, 전날의 학살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그리고 웅덩이의 저 피는 누구의 피인 걸까요. 사진은 유럽 한 광장의 물웅덩이 모습. [Gerald·Wikimedia Commons]
‘반동’으로 찍힌 가오싱젠…책 출판권 몰수까지
‘탈출’이 발표된 시점은 1991년이었습니다. 가오싱젠은 ‘금천(今天)’이란 이름의 문학잡지에 이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작품 발표 후 중국 당국은 이 잡지를 ‘반동 출판물’로 지정하고 잡지를 폐간시킵니다.

가오싱젠 탄압도 본격화됩니다. 그의 중국 공산당원 자격과 당직이 박탈됩니다. 그리고 가오싱젠의 작품 전편은 중국 내에서 영원히 ‘금서’로 지정됐으며, 지금도 못 읽습니다. (중국의 절대 치부인 천안문사태를 정면으로 거론한 데다, 학살 피해자의 심리를 다뤘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나 가오싱젠은, 그런 당국 결정에 두려움을 갖긴커녕, 오히려 코웃음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1989년 6월 천안문사태가 발생한 직후 가오싱젠은 이미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당 탈퇴’를 선언한 이후였으니까요.

1991년 5월 스웨덴의 한 왕립극장 연설에서 가오싱젠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습니다. 나는 그들(중국 공산당)의 결정이 너무 늦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2년 전 그들이 인민들에게 총격을 가했을 때 나는 이미 파리에서 중국 공산당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공산당도 나에게 원고를 바꾸라고 강요할 순 없습니다.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오싱젠의 모습. 2012년 촬영된 모습입니다. [jwh·Wikimedia Commons]
하지만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가오싱젠이 비판하는 과녁은 폭압적 당국뿐만 아니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천안문사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도 논란이 됐고, 그는 이 작품 때문에 양쪽에서 비판을 받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중년 남성’은 가오싱젠의 분신(페르소나·persona)으로 읽히는데, 중년 남성은 분명히 작품 속 대사를 통해 민주화운동을 ‘회의적으로’ 바라봤으니까요. (비판보다는 회의적 시각에 가까울 겁니다.)

그렇다면 가오싱젠은 왜 천안문사태를 다룬 걸까요.

“생명을 베팅하라?” 그건 인류가 반복한 ‘함정’
다시, 세 사람이 고립된 어둠의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오싱젠은 저 익명의 중년 남성의 ‘입’을 통해 인류사 전체를 조망합니다. 중년 남성의 주장(논리)은 이렇습니다.

‘인간 생명이 존엄하다는 사실, 그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 그런데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분기점마다 인간은 생명을 바쳐야 했다 → 그렇다면 ‘존엄한 생명의 가치와 사회변혁의 가치 가운데 우선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 인간은 그 점에 대해 답할 수 없음에도 대개 사회변혁을 선택해 고통을 겪었으며 이것은 인류사의 반복되는 함정이었다 → 따라서 인간은 그 문제로부터, 또 저 세상으로부터 탈출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수묵화가로도 유명한 가오싱젠의 작품 ‘해변에서’(2016). 마치 고립된 인간을 그려낸 것만 같은 풍경입니다. [국립대만사범대학(NTNU) 가오싱젠센터]
좀 쉽게 말해볼까요. 가오싱젠의 눈에 비친 세상사는 이렇습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생명을 베팅해야만 하는 것이 인류의 거대한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운명을 거부할 수도, 그것으로부터 물러날 수도 없다는 점이 인간 비극의 굴레라고 그는 봅니다.

저 비극을 겪지 않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그 비극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것이지요.

창고 안의 세 사람은 인류의 상징, 인간의 운명인 셈입니다. 소녀는 현실의 여성, 청년은 현실의 남성, 중년 남성은 세계 밖의 비관자(작가 자신)가 됩니다. 창고는 밖을 볼 수 없는 고립된 처소이며, 그건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은유입니다.

세계(창고)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존재인 모든 우리는, 더 본질적으로 ‘나’ 자신(육체)에게서 ‘탈출’할 수가 없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영혼(자아)은 육신(물리적 신체)으로부터 이탈할 수 없습니다. 세계로부터, 또 자기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데도 그 운명을 살아가야 하므로 인간 삶은 비극적이었다는 게 가오싱젠의 사상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이 ‘탈출(Escape)’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희곡작가 가오싱젠의 문학적 저변은 프랑스 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앙리 라보리(1914~1995)의 사상에 근거합니다. 왼쪽 사진은 앙리 라보리의 대표작 ‘탈출을 찬양하며(Éloge de la fuite’)의 표지. 1976년 프랑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폴리오 총서로 출간된 책입니다. [ErlingMandelmann.ch·Wikimedia Commons]
가오싱젠의 희곡 ‘탈출’은, 인간행동을 관찰했던 20세기 중반의 의학자이자 철학자 앙리 라보리(1914~1995)의 책 ‘탈출을 찬양하며(Éloge de la fuite)’에 기대고 있습니다.

가오싱젠이 이 책 ‘탈출’의 후기에 언급한 ‘탈출을 찬양하며’의 핵심 문장은 이렇습니다. 저항세력이 하나의 집단으로 모일 때, 개인은 그 집단 내에서 예속 상태로 전락한다.

가오싱젠에게도, 앙리 라보리에게도, 집단의 운명보다 중요한 건 개인의 운명이었습니다. 가오싱젠이 비판하는 지점은 바로 ‘개인에 앞선 집단’이었던 것이지요. 가오싱젠이 베이징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비판한 것이기보다는, 그 이상의 가치, 즉 ‘개인은 세계에 우선한다’는 가치를 희곡 ‘탈출’을 통해 말하고자 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걸 ‘민주화운동 비판’이라고 볼 순 없지 않을까요.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오싱젠에게 영향을 끼친 앙리 라보리의 저서 ‘탈출을 찬양하며’를 기리는 프랑스 웹사이트. 앙리 라보리는 무력한 인간의 찬양이 아니라 세계와 집단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난 인간의 필요성을 간파합니다. [앙리 라보리 웹사이트]
中 “최초 노벨상 수상? 우리를 ‘모독’하지 말라”
시간을 더 앞당겨서, 가오싱젠의 생애를 잠시 살펴볼까요.

1940년 중국 장시성에서 태어난 가오싱젠은 상상을 초월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은행간부, 어머니는 연극배우였습니다. 집안에는 바이올린, 피아노, 회화를 가르치는 개인 교사가 항시 대기중이었다고 하네요.

그야말로 ‘도련님’으로 성장했던 가오싱젠의 삶은, 그러나 몰락합니다. 베이징외국대학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문학 번역가로 일하던 평온했던 삶은, 문화대혁명을 겪으며 종이처럼 구겨집니다.

인간의 광기로 물든 문화대혁명 때문에 가오싱젠은 10년간 노동교화형에 처해집니다. 사진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삼체’에서 문화대혁명을 묘사한 장면. [넷플릭스 ‘삼체’ 티저 예고편 영상 캡처]
가오싱젠은 이른바 노동교화 수용소에 유배되는 하방(下放)에 처해졌습니다. 그 세월이 무려 10년쯤 됐습니다.

하지만 가오싱젠은 몰래 희곡을 쓰면서 무참했던 세월을 애써 견뎠고, 1976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면서 10년간 쌓아뒀던 결과물(희곡)을 세상에 발표했습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예술인 단체의 간부로 낙점되는데, 체제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작품을 쏟아냈으니, 바로 ‘버스 정류장’ ‘절대신호’ 등 훗날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줄 희곡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도 ‘금서’로 지정됐고, 연극 공연이 중단되는 등 고초를 겪었습니다.

2000년 가오싱젠의 노벨상 선정 사유를 기술한 스웨덴 한림원의 공식 보도자료. 그의 노벨상 수상은 ‘중국인 최초’였지만 그는 중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선택해 프랑스 시민권을 얻은 뒤였기에 중국은 가오싱젠의 노벨상 수상을 비판했습니다. [노벨문학상 웹사이트]
‘금서 작가’로 내몰린 가오싱젠은 1987년 난민 자격으로 프랑스로 떠납니다. 그 직후인 1991년, 방금 우리가 함께 살펴본 작품인 희곡 ‘탈출’을 발표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2000년 스웨덴 한림원이 가오싱젠을 200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합니다.

가오싱젠의 노벨상 선정 사유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보편적 타당성과 날카로운 통찰력, 언어적 독창성으로 가득한 작품을 통해 중국 소설과 희곡의 새 지평을 열다(for an œuvre of universal validity, bitter insights and linguistic ingenuity, which has opened new paths for the Chinese novel and drama).” (2000년 10월, 스웨덴 한림원 공식 보도자료)

가오싱젠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장면. 24년 전 영상이어서 화질이 좋진 않습니다. 가오싱젠의 이날 연설 전문은 한국에 번역 출간된 ‘창작에 대하여’에 수록돼 있습니다. [유튜브 영상 캡처]
이때, 스웨덴 한림원은 가오싱젠의 문학을 분명히 ‘중국’과 연관시켰습니다(‘…Chinese novel and drama.’) 그러나 가오싱젠의 수상 소식을 들은 중국 정부는, 자국 출신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배출이란 장엄한 소식에 열광하기는커녕, 한림원 선택을 “정치적 결정”이라며 맹비난했습니다.

2000년 10월 13일 기사를 찾아보니, 친정부 성향의 중국작가협회 대변인 징 쟝팡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중국에는 가오싱젠보다 뛰어난 수백 명의 작가가 있다. 가오싱젠은 중국인이 아니라 프랑스인이며, 문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중국은 현재 자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를 가오싱젠이 아닌 모옌(2012년)으로 주장합니다. 가오싱젠의 프랑스 국적 취득일은 ‘1998년’이므로 틀린 설명은 아니지만, 가오싱젠의 문학을 ‘프랑스적’이라고 보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는 가장 ‘중국적인’ 방식으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사실 중국은 자국의 반정부 인사의 노벨상 수상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건 가오싱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201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시민운동가 류샤오보의 수상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가오싱젠의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 스웨덴 한림원이 배포한 중국어 보도자료. 번체와 간체 두 버전으로 모두 발표했습니다. 가오싱젠의 당시 국적은 프랑스였지만 너무나 명백하게도 스웨덴 한림원은 ‘중국 작가로서의 가오싱젠’에게 노벨상 메달을 안긴 것이라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노벨문학상 웹사이트]
“참다운 문학은 인간을 꾸밀 액세서리가 아니다”
가오싱젠은, 문학은 그 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해야 하며, 문학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좌든 우든 가리지 않습니다. 가오싱젠은 이렇게 씁니다.

“문학이 존재 이유를 지니려면 결코 정치의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문학은 미약한 개인의 목소리로 돌아와야 한다. 문학의 정치적 경향성과 작가의 정치 성향에 대한 논쟁은 20세기에 문학을 병들게 한 가장 큰 원인이다.” (가오싱젠의 예술 에세이 ‘창작에 대하여’, 28쪽)

나아가 가오싱젠에게 문학은 뜨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뜨거운 문학이란, 문학을 사회 변혁의 도구로 삼는 자들의 것입니다.

반면 차가운 문학이란 무언가에 쓰이기 위한 도구로서의 ‘액세서리’같은 문학이 아니라 그저 예술 그 자체로 삶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가오싱젠 문학의 요지입니다. 그는 ‘차가운 문학의 회복’을 주장합니다.

가오싱젠의 예술론이 집약된 책 ‘창작의 대하여’. 한국에도 출판돼 있습니다. [돌베개]
가오싱젠의 수묵화 ‘기다림’(2004). [국립대만사범대학(NTNU) 가오싱젠센터]
가오싱젠에 따르면 인간은 탈출할 수 없는 ‘갇힌 존재’입니다. 사람은 자기 육신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고, 주변인과의 관계로부터, 또 우리가 발 디딘 중력의 세계에서 도망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희곡 ‘탈출’은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영원한 고민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하나의 질문이 남습니다. ‘안주함으로써 내가 아닌 상태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탈출함으로써 ‘나’로서 존재하느냐’입니다. 그것이 가오싱젠의 물음을 응축하는 마지막 한 문장일 것 같습니다.

◎ Gao Xingjian, Escape and The Man Who Questions Death, translated by Gilbert C. F. Fong,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Press, 2007. ◎ 국립대만사범대학(NTNU) 가오싱젠센터(archives.lib.ntnu.edu.tw/gaoxingjiancenter/index_e.jsp) ◎ 이정인, 「‘이방인’과 ‘국가인’의 경계에 선 가오싱젠(高行健)」,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제43호, 2007, 185~213쪽. ◎ 가오싱젠, 『창작에 대하여』, 박주은 옮김, 돌베개, 2013. ◎ 앙리 라브리 ‘탈출을 찬양하며’ 웹사이트(elogedelasuite.net)

※ 다음주에는 살만 루슈디의 《KNIFE》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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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의 작가와 금서의 독자는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살아가지만 서로 같은 같은 태양을 보고야 마는 것이다.” (『나쁜 책』, 글항아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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