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만난 눈, 마치 인생처럼…일본 북알프스를 가다 [ESC]

한겨레 2024. 5. 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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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여행 일본 북알프스 시로우마산③
아이젠도 없이 2932m 정상으로
정신 차리고 오른 ‘설계’ 끝자락엔
화창하고 청명한 하늘과 야생화
‘상상 속의 등반’ 꿈이 이뤄졌다
시로우마산 설계 구간.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설계(눈이 여름철에도 녹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높은 산골짜기)를 보는 순간 당혹스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설계를 안전하게 돌파하려면 최소 아이젠 정도는 필요한데 준비가 부족했다. 여름 산행이라고만 생각했지 3000m 산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되돌아가야 하나? 여기까지 왔는데? 족히 1시간 반 이상은 산속 깊숙이 걸어들어왔기에 빠져나갈 생각을 하자 그 또한 막막했다.

주변을 둘러봤다. 함께 올라온 등산객 대부분은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등산화에 끼우느라 여념이 없었고 개중에는 스노슈즈(눈 위에서 이동을 편리하게 해주는 보행 도구)를 착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마음만 앞서 장비 확인을 꼼꼼하게 하지 못했음을 반성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 의지로 도무지 어쩔 수 없어 돌아오게 되더라도 우선은 가보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다.

마치 인생과도 같은 등반길

이 산의 이름이 왜 ‘백마(白馬)’인지 알 만한 새하얀 설계 위로 기나긴 행렬이 이어졌다. 내 앞뒤로도 등산객이 줄줄이 대열을 이루었다. 길은 하나였다. 오랜 세월 이 산을 오르내린 사람들이 남기고 남긴 발자국으로 인해 생긴 길이었다. 한데 병목 현상이 답답해 혹여 다른 넓은 길로 우회해 오른다면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바로 크레바스 때문이었다. 크레바스란 눈이나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틈을 말한다. 불분명한 길 위를 걷다가 만에 하나 크레바스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다.

시간이 흐르자 앞뒤 사람과 조금씩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산행 속도가 빠른 사람은 앞선 사람을 제치며 길을 올랐고 산행 속도가 느린 사람은 그때마다 가장자리에 비켜서서 길을 양보했다. 나도 평소 걸음은 빠른 편이었지만 이번 경우에는 아이젠이 없었기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여름에도 쉽게 녹지 않는 설계는 마치 계단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애초의 우려와 다르게 설계는 제법 오를 만했으나 경사가 가파른 지점에서는 아찔했다.

천천히 설계를 오르는 동안 긴장으로 굳어 있던 마음은 점점 편안해졌다. 멀리 올라가는 사람이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언제 저기까지 올라가지? 한숨과 함께 까마득해질 때면 멈춰 서서 뒤돌아봤다. 아래로 많은 사람이 올라오고 있었고 그 너머로 이 산의 계곡이 끝없이 굽이쳐 흘렀다. 이제 내려가는 길은 더 어려웠다. 하산은 다른 루트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오르는 길에 집중했다. 올라갈 자신도 없었으나 그 못지않게 내려갈 자신도 없는 것. 그것은 마치 인생 같았다.

산 너머 어디선가 낙석 소리가 들릴 때마다 흐려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시야를 가리던 안개를 뚫고 설계의 끝자락에 다다른 시각은 오전 10시, 당장에라도 비가 올 것 같은 아래 세상과는 다르게 산의 상부는 화창하고 청명한 하늘을 이고 있었다. 곳곳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노랗고 하얀 야생화를 바라보며 새삼스레 안도했다. 눈과 바위 등 무색무취의 세계를 지나 이 산에서 마주한 첫 번째 경이로운 생명이었다. 그 화사함에 지금까지의 고생을 보답 받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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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

시로우마산 정상 부근에 있는 하쿠바산장.

이후 정상 부근에 있는 하쿠바산장을 깃발처럼 보고 올라왔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언덕 위의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희망이었다. 하지만 사물은 보이는 것보다 항상 더 멀리 있는 법. 그 후로도 족히 1시간은 더 걸려 하쿠바산장에 도착했다. 이곳은 무려 등산객 1200명을 수용하는 일본에서 가장 큰 산장이었다. 하쿠바산장에서 500㎖짜리 콜라 한 병을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우리 돈으로 무려 8000원이었으나 물자가 귀한 산이라 아깝지 않았다. 산장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다시 정상을 향했다.

능선 위를 걷는 내내 츠루기다케(2999m)와 다테야마(3015m) 연봉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당장에라도 이어 오를 수 있을 듯 가깝게 느껴졌다. 시로우마산과 함께 북알프스를 대표하는 두 산. ‘저 산들도 언젠가 꼭 올라봐야지’ 다짐했다. 늘 다음을 기약하게 하는 산. 한 번도 안 오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오른 사람은 없는 곳 또한 산이 아닐까. 산장 방면으로 내려서는 사람들이 정상까지 다 왔다며 힘을 내라고 응원의 말을 건넸다. 저들은 어디에서 올라와 어디까지 가려나? 그들의 뒷모습을 보려고 뒤돌아보니 그들도 뒤돌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로우마산 정상을 알리는 나무판.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얕은 돌탑 위에 돌로 눌러놓은 이 나무판을 들고 등산객들은 기념사진을 남긴다.

산장을 출발한 지 넉넉히 20여분만에 시로우마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해발 2932m임을 알리는 표지목과 더불어 탑 형태의 조형물이 서 있었다. 산정을 뒤덮던 구름은 어느새 발밑에 깔려 있었고 어디를 봐도 더 오를 곳은 없었다. 해냈다는 성취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올랐다. 처음 하쿠바촌에 들어서던 날 밤부터 등산로 입구에 이르기까지, 이 산을 오르기 위해 번번이 뒤꽁무니를 잡았던 숱한 망설임과 두려움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2023년 여름, 그렇게 나는 긴 시간 마음에 품었던 상상의 산 시로우마산을 올랐다.

문득 정상을 오른 기쁨과 산의 아름다움을 나눌 사람이 지금 곁에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올랐고 그들을 생각하자 가슴이 조금 미어졌다. 하치가다케(2563m), 유키쿠라다케(2611m) 등 능선은 북쪽으로 끝없이 이어졌으나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더 가고 싶은 마음이 반, 얼른 마을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그럼에도 갈 길은 멀었다. 다시 지도를 펼쳤다. 시로우마산과 함께 하쿠바 3산으로 알려진 샤쿠시산(2812m)과 하쿠바야리가다케(2903m)를 거쳐 하산해보기로 했다. 가능할까?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다.

장보영 등산여행가

스물다섯 살에 우연히 오른 지리산에 매료된 이후 히말라야와 알프스, 아시아의 여러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을 달리기 시작했고 산악 잡지도 만들었다. 지은 책 ‘아무튼, 산’은 산과 함께한 청춘의 후일담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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