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에서 ‘우리 아이들’로 눈이 트였어요

한겨레 2024. 5. 11.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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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박수정의 오늘, 여성노동자
학교에서 책 읽어주는 엄마
실적 압박 심했던 고객센터 퇴직
초등학교 책 봉사 동아리 활동
수업 전 책 읽어주고 점심 땐 ‘사서’
‘다른 환경’ 아이들 보며 눈물도
30여년 전 혜선씨가 퇴근한 어머니께 읽어드렸던 ‘마주보기’와 ‘님의 침묵’. 혜선씨 제공

“혜선아, 시 좀 읽어줘.”

종일 편직기 앞에서 스웨터를 짜고 돌아온 엄마는 저녁상을 치우고 나면 초등학생인 큰딸에게 시를 읽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어린 혜선은 엄마의 시집을 펼쳐 시를 읽어주었다.

“엄마가 책을 많이 읽으셨던 건 아닌데, 시는 좋아하셨어요. 일하고 오셔서 쉬실 때면 제가 읽어드렸어요. 엄마는 누워 계셨던 것 같고요. 내가 시를 읽어주면 엄마가 좋아하셨어요.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읽었던 게 기억나요. ‘마주보기’라는 시집도 있었고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거예요. 생각해 보면, 일하고 왔는데 아이가 시를 읽어주면 엄마가 좋았겠다 싶어요. 엄마도 가끔 말씀하셨어요. 그때 네가 이렇게 시를 읽어줬다고.”

퇴근한 엄마에게 시 읽어주던 딸

혜선씨는 30년도 더 전에 어머니에게 읽어주었던 시집 제목을 기억했다. 동생에게 부탁해 찾아보니 칠순 어머니 집에 어린 딸이 어머니에게 읽어주었던 시집 두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1985)과 에리히 케스트너의 ‘마주보기’(1988). 어린 딸이 들려주는 시로 하루 노동의 피로를 풀었던 어머니, 여성노동자. 편물을 짜고 받은 어느 달 월급에서 각 2천원 주고 산 시집.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시집 켜켜이 어떤 시간의 흔적이, 엄마와 딸의 숨결이 남아 있겠다.

“엄마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 일하셨어요. 집에는 주로 동생이랑 저, 둘이 있었죠. 온전히 엄마랑 소통하고 이러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기억나는 게,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었어요. 제가 이제 대문을 열어 문을 붙잡고는 ‘우리 엄마 집에 있지! 우리 엄마 집에 있지!’ 막 이랬어요. 엄마가 집에 있는 게 그렇게 좋았나 봐요. 어쩌다 엄마가 집에 있는 날이면 엄마가 라면을 끓여줘서 동네 애들하고 다 같이 라면 먹었던 기억도 나요.”

혜선씨는 이제 어릴 적 엄마의 나이와 비슷해졌다. 초등학생과 유치원생 남매를 둔 엄마가 되었다. 혜선씨는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는데, 글쎄, 거기서도 책을 읽어준다.

“어느 날, 학교 복도 저만치서 1학년인가 2학년쯤 돼 보이는 꼬마애가 두 팔을 벌리고 ‘선생님!’ 부르면서 저를 안으려고 달려와요. 어? 누군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래도 반갑게 ‘그래 그래’ 했는데, 걔가 ‘선생님, 다음에도 또 책 읽어주세요’ 그래요. 아! 내가 그전에 책 읽어준 반 아이였어요. 수업 시작 전 10분, 엄마들이 찾아가 책을 읽어주는데 그게 아이에게는 소중한 기억으로 남았나 봐요.”

혜선씨는 큰애 초등학교 도서관의 엄마들이 참여하는 책 봉사 동아리 회장이다. 회원 스무명이 한주에 한 학년씩 각 교실에 들어가 책을 읽어주고, 짧게라도 아이들끼리 느낌과 생각을 서로 나누고 소통하게끔 이끈다. 그 10분을 위해 회원들은 자주 모여 책을 고르고 읽고 토론하고 연습한다. 회원들은 또 점심시간 사서로 봉사하며 도서관을 찾은 아이들을 돌본다. 4월에는 세계 책의 날(23일)이 있어 다른 때보다 더 바삐 학교를 오갔다. 임노동이 아니다 뿐, 혜선씨는 날마다 출근하는 직장인만큼 바쁘다.

“도서관에 애들이 많이 와요. 자꾸 보니까 더 예뻐요. 처음에는 저학년 애들만 어린이라 생각했는데, 가만 보니까 6학년도 키만 컸지, 어리고 순수해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공간에서 그렇게 많은 아이를 볼 일이 없잖아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아요. 저 예쁜 애들이 저마다 다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잖아요. 자라잖아요. 세상은 불공평하고 불평등하잖아요. 애들한테서 그런 게 보일 때가 있어요. 어떤 애는 잘 사랑받고 자라는구나 싶고, 어떤 애는 잘 모르지만 어떤 부재가 느껴지기도 하고요. 애들의 그런 뭔가가 가슴에 다가와, 엄마들끼리 얘기하면서 같이 울기도 했어요. 사실 그냥 우리 애만 키우면 모르는데, 학교에서 활동하니까 그런 게 보이더라고요.”

회원마다 시작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몰라도, 이 일을 하면서 곧 다들 내 아이한테서 우리 아이로 눈길이 트였다. 내 아이만큼 다른 아이들도 참 예쁘고 마음이 가더란다. 그래서 엄마들은 더 애쓴다. 직장이라면 퇴근이라도 있지, 혜선씨는 집에서도 도서관 동아리 일과 활동을 고민한다. 회장 선에서 결정하고 진행하면 빠르고 쉽겠지만, 우왕좌왕 “줏대 없어” 보여도 혜선씨는 회원들의 의견을 일일이 모으고 귀 기울인다.

혜선씨는 도서관 활동 말고도, 학교운영위원회와 소급식위원회 일도 맡았다. 작은애 유치원에서는 학부모회 임원이다. 학생의 양육자도 교육공동체의 일원.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자신이 해보자고, 선뜻 나섰다. 다른 이가 부탁하면 쉬이 거절하지 못하는 성정도 있지만,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무엇에든 배우겠다는 삶의 자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어떻게 사는 게 나다운 걸까 고민하면서, 제 삶의 모토를 하나 만들었어요. ‘마음이 끌리는 게 있으면 외면하지 말고 주저하지 말고 그냥 우선 하자. 먼저 나를 거기에 밀어 넣자. 내 몸을 거기에 갖다두자.’ 이런 거예요. 그래서 올 1월에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을 땄어요. 지금은 임상심리사 자격시험을 준비해요. 웰다잉과 임종간호(호스피스)에도 관심이 있어 그림책 읽어주기 모임에 참여해 공부하고요. 이런 모토를 생각한 게, 사실 지금도 그런데, 저는 되게 나보다는 타인을 자꾸만 생각해요. 감정도, 내 감정보다는 타인의 감정을 더 생각하고, 자꾸만 그렇게 돼요. 예전 직장 일에서 영향을 받았을까 싶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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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크기와 노동 가치 같지 않은데…”

혜선씨는 예전에 공기업 외주 고객센터에서 상담사로 취업해, 파트장과 큐에이(QA·상담품질검사) 강사를 거쳐, 상담팀장으로 일했다. 상관이 “여기서 일하면 그 어느 곳에 가서도 잘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감정노동이 집중된 곳이었다. 원청은 한 건물 세개 층에 각각 다른 외주 업체를 들여 경쟁시켰다. 혜선씨는 일을 잘하고 싶어 자진해서 야근도 하고 주말에도 나가 일했다.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일에서 보람과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상담사를 압박하는 일에 마음이 힘들었다.

“상담사가 아픈데도 일일이 보호하고 배려하다 보면 일이 안 되니까 외면하는 관리자들을 봤어요.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는. 그렇게까지 실적 압박을 해야 하는 게 저하고는 안 어울렸죠.”

당시 고객센터에서 혜선씨는 사방으로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위로는 상관 관리자, 아래로는 상담사, 수화기 너머 민원처리 고객, 점검해야 하는 상담 통화녹음…. 듣기만 하고 하지 못한 말이 있었을까.

“어떤 고객이 그런 말을 했어요. ‘난 여기서 더운 날 땀 흘리며 일하는데 당신들은 거기 시원한 실내에 앉아서 편하게 일하지 않냐’고. 아니에요. 등줄기에 땀 삐질삐질 흘리며 일했던 상담사가 많았어요. 저 역시 그랬어요. 더 좋은 실적 내려고요. 민원 안 만들려고요. 육체노동만이 진짜 노동은 아닐 거고, 임금의 크기와 노동의 가치가 같지만은 않을 건데, 사람들은 임금이 높지 않으면 그 일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는 것 같아요. 서로 다른 지점에서 힘들 수 있다는 걸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모든 일은 가치가 있다고, 어디에서건 지금 잘 쓰이고 있거나, 애쓰고 있거나, 하려고 한다면… 허튼 시간은 아닐 거라고, 나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네요.”

르포 작가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 저자. 여성노동자가 머물고 움직이는 장소, 일하는 시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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