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4·3 생존자,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의 삶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2024. 5. 11.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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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제주4·3 76주년 추도식이 열렸다. 95세가 된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의 시가 낭송되었다. ‘사회주의자 청년 김시종’은 4·3봉기에 동참했다.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은 1948년 4월3일 제주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에 동참했다. ⓒ양동규 제공

일본 도쿄(4월20일)와 오사카(4월21일)에서 제주4·3 76주년 추도식이 열렸다. 올해 도쿄의 추도식은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의 강연과 현기영의 4·3 소설 〈순이 삼촌〉을 오페라로 창작한 ‘순이 삼촌’의 갈라 콘서트로 구성되었다. 그의 시 〈웃다〉 낭송으로 추도식이 시작됐다.

‘기억에는 기억을 멀어지게 만드는/ 기억이 있다./ 긴 세월 동안 뒤섞이고 쌓여서/ 그 순간 순간이 또 다른 장면으로/ 변하기도 해서/ 잠들 수 없는 밤의 모처럼의 잠을/ 방해하고 만다./ 돌이켜보면 다시금 똑같은/ 쫓기다 숨던 공포에 떠는 꿈이다(〈웃다〉 중에서. 이하 시 번역은 모두 필자)’

그리고 묵념. 참석자 500여 명이 각자 어떤 죽음을 상기하고 어떤 희생의 명복을 빌었다. 김시종은 ‘희생과 위령제’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그는 제주도에서 열린 공식 위령제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조선적(朝鮮籍)이어서 자유롭게 제주도를 오갈 수 없기도 했지만 2003년 부모 산소에 성묘하러 가기 위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꾼 후에도 그렇게 한다. 가족과 동지들을 살육의 광풍 속에 팽개치고 혼자 도망쳐 살아남았다는 수치심을 평생 안고 산다. 그의 어머니 기일도 공교롭게 4월3일이다. 제주에선 부모 형제의 제삿날이 겹치는 사람들이 천지에 널렸다. 시인 김시종은 악몽에 시달리며 시를 지팡이 삼아 천지를 짊어진다.

‘내게는 기도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짐이/ 씻을 수 없는 죄가 되어/ 웅크리고 있다./ 홀로 아버지를 묻은 어머니의/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의 어둠에/ 두 손 모은다./ 연루되어 나를 숨겼기에 당한/ 숙부의 억울한 죽음의 신음을 견디며/ 묵념을 한다./ 동시에 나를 이끌어 입당까지 시킨 그가/ 찌부러진 얼굴로 숨이 끊기던 무참한 모습에/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문다(〈웃다〉 중에서).’

4월3일이 오면 오사카에서 김시종은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며 고향 제주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두 손 모아 기도를 한다. 그런데 그는 뭔가 불편하다. “지금 한국에서 ‘추념’되는 ‘희생자’라는 호명에서 ‘성스러운 죽음’을 당한 ‘희생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그처럼 나도 한국의 여러 위령제에서 희생자가 ‘영령(英霊)’이라고 불릴 때 불편하다. 나는 ‘영령’을 일본어로 직역을 하지 못한다. 4·3의 죽음들이 전장에 나가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킨 사람들의 죽음을 칭송하는 ‘호국 영령’, 더 나아가자면 ‘야스쿠니 영령’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부푸는 느낌이다.

‘여자가 웃고 있다./ 요기에 홀린 귀신 같은 표정으로/ 눈을 치켜 뜨고 웃고 있다./ 참혹한 살육의 4·3 속/ 장비도 장엄한 토벌대 군경에게/ 양손을 크게 벌리고/ 깔깔 키득키득 웃기 시작한다./ 부풀은 젖가슴도 허옇게 드러낸/ 흘러내린 치마에 맨발의 여자/ 온 마을이 불타버려 젖먹이까지도 총살당한/ 교래리의 학살에서 혼자 남겨진/ 세 아이의 어머니가 그녀다(〈웃다〉 중에서).’

김시종은 4·3이 숭고한 희생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납작하고 속이 텅 빈 허례로 말라비틀어져선 안 되고 힘들더라도 하나하나 구체적인 ‘죽음’을 대면하고 말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죽임을 당하던 그 순간에 훅 끼치던 공포들, ‘숙부’의 신음과 억울함, 온 마을이 불태워지고 홀로 살아남아 미쳐버린 ‘그녀’가 견뎌야 했던 차가운 눈초리들을 상기하는 위령을 하자고 한다. 그래야 4·3이 ‘나의 4·3’이 되어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사회주의자의 고백

김시종이 제주도에서 열리는 공식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지금 한국 정부가 ‘허락’한 명예회복의 대상이 아니다. 청년 김시종은 1947년 남로당에 입당하고 이듬해 4월3일 민중 봉기에 동참했다. 그리고 토벌대에 쫓겨 숨어 지내다가 1949년 6월 일본으로 탈출했다.

오랜 운동에 힘입어 2000년에야 겨우 제주4·3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과거 청산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합의의 부재로 인해 과거사 정리 작업은 주로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에 초점이 맞춰졌다. 2001년 헌법재판소는 자유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내세워 희생자 중 상당수를 배제하라는 기준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제주4·3위원회는 남로당 간부나 봉기 가담자를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2021년과 2022년 문재인 정부는 두 차례 제주4·3특별법을 개정했다. 이에 따라 현 정부는 2022년 11월7일 4·3 희생자 보상금 첫 지급 이후 4월 현재까지 보상금 지급이 결정된 청구권자 4만9639명 중 3만8923명(해외 거주자 포함)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또한 특별 재심을 통해 2530명의 군사재판 피해 수형자 중 1600여 명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나아가 4·3의 추가 진상조사를 일본까지 확대해 재일 제주인들의 피해와 진상조사를 실시하는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희생자에게 사상의 잣대를 들이대 정치적으로 배제하고 선별하는 일은 여전하다.

4월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때 여당은 과거 제주4·3이 북한 정부의 지령이라고 주장한 인물을 공천했다. 4월2일에는 〈제민일보〉가 ‘제주4·3은 공산 폭동의 날’이라는 지면 광고를 실었다가 사과했다. 지난해 고위공직 후보자가 자식의 학교폭력으로 임명이 취소된 일이 있다. 당시 17세의 가해자는 제주도 출신 피해자에게 ‘제주도에서 온 돼지‘ ‘좌파 빨갱이’라는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제주4·3에 대한 부인과 왜곡이 계속된다. 희생자에 대한 비방과 모욕이 계속된다. 초토화 작전으로 제주4·3을 진압하고 학살을 자행한 책임자들은 강경 진압에 대한 반성과 사과 없이 대전현충원에 있다.

2024년 김시종은 우리에게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의 수치심과 책임’을 솔직히 고백한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통일 조국’에 대한 열망을 안고 남로당에 가입하고 봉기에 가담한 ‘사회주의자 청년 김시종’은 눈앞에서 동지가 경찰의 총격으로 머리의 절반이 날아가버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4월20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주4·3 76주년 추도식에서 창작 오페라 ‘순이 삼촌’이 무대에 올랐다. ⓒ제주도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 도쿄 제공

김시종이 원하는 것은 명예회복이나 희생자 인정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한 우리 민족과 제주인들이 어떤 사회와 국가를 꿈꿨는지에 대해, 1947년 3·1절 기념식이 열리는 관덕정 앞에 대체 왜 수만 명이 모였는지에 대해, 3·1절 기념식의 경찰 발포와 사상자 발생이 미군정에 대한 뿌리 깊은 분노에 불을 지펴 제주도 전역의 총파업으로 번져간 사실에 대해, 일본이 자신들의 왕을 보호하기 위해 포츠담 선언을 바로 수락하지 않은 탓에 소련군이 참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져 남북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에 대해, 일본 제국 대신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한 미군정의 폭압적인 반공정책과 학살 책임에 대해, 일본 제국 권력의 앞잡이였던 군경이 다시 점령군의 대리인으로 국가권력을 점유하고 폭력을 행사한 역사에 대해, 한국 사회의 제주도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과 학살의 상관관계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위령이다.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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