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전전하던 가출 청소년, 낙서 그림으로 전세계를 사로잡다 [나를 그린 화가들]

정유정 기자(utoori@mk.co.kr) 2024. 5. 1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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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셸 바스키아, 자화상(1982), 개인소장
1980년대 미국 뉴욕, 말 그대로 ‘영 앤 리치(Young and Rich)’인 20대 청년이 있었습니다.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밴드에선 클라리넷을 연주했습니다. 훤칠하고 잘생겨서 꼼데가르송 패션쇼에 직접 모델로 워킹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표지 모델로도 유명해졌죠. 뉴욕의 한 클럽에서 DJ로도 활동했는데 춤도 잘 춰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팝의 여왕’ 마돈나는 무명 시절 그의 연인이었습니다.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3개 국어를 구사해 요즘 연예계에 있다면 활동 무대가 정말 넓었을 겁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전문 배우도, 음악가도 아닌 거리의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입니다.
1985년 바스키아가 뉴욕타임스 매거진 표지를 장식한 모습.
바스키아는 재능 많고 매력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타고난 미적 감각이었죠.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도 바스키아를 보고 부럽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바스키아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가 쓱쓱 그려낸 작품에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전성기에 오른 바스키아는 스물일곱의 이른 나이에 약물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에 따라 ‘비운의 천재’로 묘사되고 신화화됐죠. 이번 연재에서는 바스키아의 비극적인 말년보다는 그가 그림을 통해 이루고 싶던 꿈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거리의 소년…낙서로 예술을 만들다
바스키아 어린 시절 모습. 왼쪽 사진부터 18개월 시절, 4세 시절, 1967년 두 여동생과 함께한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1960년 12월 22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인 제러드는 아이티 출신의 회계사였습니다. 어머니 마틸데는 브루클린에서 푸에르토리코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민 2세였죠.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바스키아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브루클린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다녔습니다. 6세에 이미 브루클린 미술관의 어린이 회원이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였습니다. 영어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모국어인 스페인어와 아버지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도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바스키아의 부모는 그가 7살 때 이혼하는데요. 이는 바스키아에게 큰 상처가 됩니다. 아버지와 살게 되면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커집니다. 그가 13세가 되던 해 어머니 마틸데는 정신병원 입원하며 병원을 전전하게 됩니다. 이후 바스키아는 아버지와 여러 차례 갈등을 겪고 종종 가출했습니다.

세이모(SAMO) 낙서 앞에 서 있는 바스키아.
1977년 바스키아는 인종차별을 겪는 학생들을 위한 대안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인 알 디아즈와 함께 그래피티 낙서 세이모(SAMO·Same Old Shit)를 만듭니다. 세이모는 ‘흔해빠진 개똥 같은’이라는 뜻인데요, 이들은 맨해튼 다운타운에 낙서를 하면서 이를 서명으로 사용했죠. 세이모는 당시 지역 뉴스에 소개되면서 유명해집니다.

1978년 바스키아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증폭되면서 학교를 자퇴하고 가출합니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길거리 생활을 시작하죠. 그는 훗날 “살던 곳이 없어서 옮겨 다녔다”며 “어떻게든 살아냈다”고 회상하죠. 15센트밖에 없어 몇 날 며칠 자지 않고 치즈 맛 과자를 먹으며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이때 바스키아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우편엽서를 만들고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았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무제(우편엽서), 1979, 개인 소장.
그의 재능을 알아본 친구 디에고 코르테즈는 바스키아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권유합니다. 이후 바스키아는 1980년 뉴욕에서 열린 ‘타임스 스퀘어 쇼’에서 낙서 같은 자신의 그림을 미술계에 선보이며 신예로 떠오릅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비행기, 1981, 앤드라 컬렉션
바스키아의 초기 작품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곱 대의 비행기가 등장하는 이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의 단순함과 어린 아이와 같은 모티프 묘사가 돋보입니다. 선은 대충 그은 것 같고 글씨는 휘갈겨 썼는데도 세련된 감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캐딜락 달, 1981, 개인 소장
‘캐딜락 달’도 바스키아의 초기 작품입니다. 바스키아는 선으로 테두리를 만들어 화면을 나눴습니다. 오른쪽에는 TV 스크린을 위에서 아래로 배치했고, 스크린 안에는 각각 정면을 바라보는 얼굴을 그렸죠. 왼편에는 자동차가 묘사돼 있습니다. 바스키아는 그림 하단 왼쪽에 ‘SAMO’ 글씨를 지우고 대신 오른쪽에 ‘장 미셸 바스키아’라는 본인의 서명을 남기죠. 거리 예술가에서 갤러리 예술가로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이후 역사학자이자 컬렉터인 아니나 노세이는 자신의 화랑 지하실을 바스키아에게 작업실로 사용하게 해줍니다. 바스키아는 이곳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는데 대박이 났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작품이 다 팔려 20만달러(약 2억7530만원)를 벌었습니다.

1982년 바스키아는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1981년 ‘뉴욕 뉴웨이브 쇼’에서 성공을 거둔 후 그는 로스앤젤레스, 스위스 취리히, 이탈리아 로마,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개인전을 열며 극찬받았습니다. 또 21세의 나이로 서독에서 열린 권위 있는 전시회 카셀 도큐멘타7의 역대 최연소 작가로 참여했습니다.

미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스키아는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신의 작품에 끊임없이 표현했습니다. 불과 40여 년 전인 1980년대에는 인종차별이 만연했습니다. 바스키아는 택시를 잡으려고 해도 승차 거부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죠.

어린 시절부터 미술관에 다닌 바스키아는 “흑인이 등장하는 그림이 많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며 “내 그림의 주인공은 대부분 흑인”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마이클 스튜어트의 죽음, 1983, 나나 클레멘테 컬렉션
이 작품은 흑인 그래피티 예술가 마이클 스튜어트가 지하철역에서 낙서한 혐의로 뉴욕시 교통경찰에 의해 사망한 후 그린 그림입니다. 당시 스튜어트는 백인 경찰 5명에게 죽을 정도로 맞고 사망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이 소식을 듣고 “내가 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고 하죠. 그림을 보면 분홍색 얼굴의 경찰관 두 명이 곤봉을 휘두르고 있습니다. 맞고 있는 사람을 검은색 그림자로 표현했는데요. 바스키아는 스튜어트 이외에도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노예 경매, 1982, 조르주 퐁피두 센터
바스키아는 ‘노예 경매’ 등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조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를 탐구했습니다. 오른쪽 푸른 바다 위 연갈색 종이들이 붙어있습니다. 이 연갈색 종이는 수천 명의 노예를 바다 건너 실어 나르던 배를 상징합니다. 이 종이 위에는 노예로 잡혀 온 아프리카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죠. 작은 얼굴들도 있어 어린이들도 끌려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배 앞에 있는 키 큰 사람은 노예를 팔거나 경매에 넘긴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림의 왼쪽에는 네모 모양으로 나뉜 땅이 보이는데요, 강대국이 제멋대로 나눴던 식민지국을 연상시킵니다. 식민지국 쪽에 있는 해골은 가시관을 쓰고 있습니다. 흑인들의 희생을 의미합니다.

바스키아는 스타로 떠오른 후에도 인종적 편견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당시 인터뷰에서도 드러납니다. 기자와 평론가들은 바스키아에게 “블랙 피카소라고 불리고 싶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다분히 인종적 코드가 섞인 질문이죠. 이들은 또 바스키아를 ‘태초의 예술가’ ‘늑대들에게서 길러진 거친 소년’이라고 소개했죠. 바스키아는 대도시인 뉴욕에서 나고 자랐는데 말입니다. 그가 지하 작업실에서 작품 활동에 몰두하자 “지하실에 갇혀서 그림만 그린다면서요?”라는 질문도 나왔죠. 백인에게는 하지 않을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바스키아는 “기분이 좋지 않다. 나는 갇히지 않았다”며 반박했습니다. 바스키아는 이같은 편견에 대해 “나를 야생마, 야생 원숭이와 같은 엉터리로 본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바스키아가 그린 자신
장 미셸 바스키아, 자화상, 1984, 요아브 할랍 컬렉션
바스키아는 자화상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 작품은 마치 엑스레이로 포착한 것처럼 바스키아의 눈, 치아, 턱 등 얼굴의 일부가 흰색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흰색 선은 자신의 피부를 묘사한 갈색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 긴장감을 주죠. 특히 입에 가득 찬 그의 치아는 불안한 느낌까지 줍니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눈은 관객들에게 고통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미술계가 자신을 예술가보다는 갤러리의 마스코트로 홍보할까 걱정했던 바스키아의 내면이 담겨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자화상(Self-Portrait as a Heel), 1982, 개인소장
두 번째 자화상 속 바스키아의 머리카락은 메두사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있습니다. 큰 콧구멍과 크게 드러나 있는 치아는 원시적이면서도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네요. 이 그림에서 보이는 얼굴의 강렬함은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아프리카 부족이 사용하는 가면을 연상시킵니다. 원제의 ‘Heel’은 뒤꿈치를 뜻하는 동시에 비행 청소년을 경멸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가 21세에 그린 이 이미지는 분노, 자신감, 비하가 모순적으로 섞여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관객과 직접 눈을 맞추고 있는 커다란 머리는 자신감을 발산하지만, 팔이 보이지 않아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죠. 이는 필요한 경우 자신을 방어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암시합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복서, 1982, 개인소장
바스키아는 흑인 권투 선수 그림을 통해 개인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주제를 풀어냈습니다. 혹자는 이 그림이 바스키아의 은유적인 자화상이라고도 평가합니다. 권투 챔피언은 뿌리 깊은 인종적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승리를 거둔 인물이죠. 백인이 주류를 이루는 미술계에 있던 바스키아는 권투 선수로부터 동질감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20대 초반의 바스키아가 이 작품을 그리며 야심 차게 활동했던 모습을 짐작할 수도 있죠.

이 그림에서 권투 선수는 두 팔을 들어 올리고 있어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 제스처는 1968년 멕시코시티올림픽 육상 시상식에서 미국 국적의 금메달리스트 토미 스미스가 동메달을 딴 존 카를로스와 메달을 받을 때 주먹을 들어 올리며 흑인에 대한 차별에 항의한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들은 당시 검은 장갑과 검은 양말을 착용한 채 연단에 올라 흑인 민권 운동에 대한 강력한 연대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림 속 권투선수도 그들과 같은 검정색 장갑을 끼고 있죠.

그런데 이 권투선수는 승리한 동시에 갈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스키아가 전성기를 누리면서도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알고 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바스키아는 놀라운 수준의 성공을 거두는 동안에도 백인 미술상과 컬렉터가 지배하는 미술계의 권력 불균형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흑인들의 왕’을 찬양하다
바스키아는 1983년 인터뷰에서 자신의 예술 주제를 ‘왕, 영웅, 그리고 거리’로 정의했습니다. 흑인의 역사를 발굴했던 그는 ‘흑인의 왕’을 찬양하는 작업을 이어갑니다. 이는 현실에서는 이뤄지지 않으니까요. 유명한 흑인 권투 선수나 재즈 뮤지션을 주제로 그림을 그립니다.

특히 재즈를 좋아했던 그는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냇 킹 콜, 빌리 홀리데이를 그렸습니다. 초기 수많은 흑인 재즈 음악가들은 연주하기 위해 호텔이나 클럽에 들어갈 때 정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뒷문이나 부엌을 통해 들어가야 했던 것이죠. 바스키아는 백인 예술 세계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가 재즈 음악가들과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바스키아는 특히 재즈 중 ‘비밥’을 좋아했는데요, 그가 좋아했던 찰리 파커 연주를 들으시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걸 추천합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킹 줄루, 1986,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킹 줄루’는 블루스 음악의 서정적인 사운드를 연상시키는 푸른 배경에 네 명의 재즈 연주자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특히 전설적인 뮤지선 루이 암스트롱을 캔버스 중앙에 배치했죠. 제목인 ‘킹 줄루’는 1949년 암스트롱이 뉴올리언스 카니발에서 줄루족 분장 퍼레이드를 이끌며 ‘줄루 왕’으로 등장한 것에서 따왔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CPRKR, 1982, 도널드 배츨러 컬렉션
바스키아는 독창성이 풍부한 연주자이자 작곡가 찰리 파커에게 특별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파커는 화려한 즉흥 연주가 특징인 비밥의 창시자라고도 불리죠. 작품 속에는 파커가 숨진 날인 1955년 4월 2일과 파커가 죽은 호텔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왕관 표시로 파커를 재즈의 왕으로 기념하며 십자가를 사용해 그를 추모합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디스코그래피Ⅱ, 1983, 비쇼프버거 컬렉션
바스키아는 마일즈 데이비스도 좋아했습니다. 작품 ‘디스코그래피Ⅰ’은 찰리 파커에게, ‘디스코그래피Ⅱ’는 마일즈 데이비스에게 헌정됐습니다. 바스키아는 캔버스 전체를 칠흑 같은 아크릴 물감으로 칠한 후 흰색 오일 스틱으로 암호와 같은 단어를 적었습니다. 재즈의 전설은 누구인지 적은 것이죠. 5중주 멤버 중 테너 색소폰의 찰리 파커, 트럼펫의 마일즈 데이비스, 피아노의 존 루이스, 베이스의 넬슨 보이드, 드럼의 맥스 로치 등 당대 최고 흑인 재즈 뮤지션의 이름을 기재하며 이들을 기념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무제(슈거 레이 로빈슨), 1982, 개인소장
권투 선수 슈거 레이 로빈슨을 예찬하기 위한 이 작품에선 왕관 무늬가 눈에 띕니다. 몇 획으로 그린 매우 단순한 작품인데요. 왕관은 비대칭 모양이고 글씨는 삐뚤삐뚤하게 쓰여 있습니다. 얼굴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보이죠.
장 미셸 바스키아, 무제(왕관), 1982, 브루클린 미술관
이 작품에서 바스키아가 왕관을 자신의 시그니처 무늬로 사용하는 점이 보이시죠. 흑인의 왕을 기념하며 왕관을 그리던 바스키아는 스스로 ‘거리 예술의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위대한 예술가가 되고자 하는 바스키아의 야망이 드러납니다.
명작 패러디로 예술 역사에 들어가다
바스키아는 본인이 존경하는 화가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관을 다녔기 때문에 미술사에 해박했죠. 그는 밀로의 비너스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리면서 “이렇게 예술의 역사에 들어간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바스키아는 고전을 오마주하면서도 항상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습니다. 바스키아의 패러디 작품을 나열해보겠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무제, 1982
장 미셸 바스키아, 모나리자, 1983, 개인소장
장 미셸 바스키아, 무제(미치광이의 머리), 1982, 개인소장
위의 두 그림이 차례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을 닮지 않았나요? ‘모나리자’의 경우 이상적 아름다움, 이상적 여성상이라는 개념을 조롱하듯 짓궂게 묘사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처럼 보이는 두 번째 작품 ‘무제(미치광이의 머리)’는 인물을 만화처럼 캐리커처하는 방식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자주 사용하는 해골의 이미지를 더했죠.
우상이었던 앤디 워홀과의 우정
바스키아는 엽서를 만들어 팔던 시절 식당에 있는 앤디 워홀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엽서를 사라고 권한 적 있습니다. 실제로 워홀은 바스키아의 엽서를 샀죠. 하지만 두 사람의 진정한 우정이 시작된 건 1982년 10월 미술품 딜러인 브루노 비쇼프버거가 둘을 소개해준 이후입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두 사람, 1982, 개인소장
‘두 사람’은 바스키아가 그의 우상인 워홀과 만난 후 그린 첫 그림입니다. 바스키아는 워홀을 만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워홀 옆에 자신이 있는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팝 아트의 거장을 만난 젊은 예술가의 열정과 흥분이 느껴지지 않나요. 워홀은 이를 보고 “정말 부럽다. 나보다 더 빨리 그린다”며 감탄했다고 합니다. 작품 속 두 사람의 얼굴은 크게 대비됩니다. 워홀은 턱을 괴고 있네요. 얼굴은 창백한 빙하 같이 묘사했고 워홀이 쓰던 은빛 가발도 있습니다. 그림 속 바스키아는 워홀을 만나 신난 표정입니다. 자신의 거친 머리카락을 강렬한 붓 터치로 표현하며 오른쪽 화면의 절반을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1983년 바스키아와 워홀 <앤디 워홀 재단>
바스키아는 워홀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쌓았습니다. 동성애자인 워홀이 바스키아에게 푹 빠졌다는 말도 있지만, 이성애자인 바스키아에게 워홀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워홀은 바스키아를 아들처럼 따뜻하게 챙기며 진심으로 위했다고 하죠. 미술계에서 경쟁과 압박, 불안에 시달렸던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멘토로 여기게 됩니다.
워홀·바스키아, 바나나, 1984, 개인 소장
1984년 바스키아는 워홀과 공동 작업에 돌입하고 전시를 합니다. 야심 차게 준비했지만, 당시 비평가들은 둘의 협업을 형편없는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듬해에도 두 사람은 공동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1985년 합동 전시에서도 혹평이 이어지며 둘은 협업을 끝냅니다. 워홀에게는 “바스키아를 이용한다”는 말이 나왔고, 바스키아에게는 “워홀의 자발적인 액세서리나 다름없다”는 평가까지 나왔습니다. 이에 깊이 상심한 바스키아는 더 이상 워홀의 작업실에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워홀의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둘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끝난 셈입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 묘비, 1987, 개인소장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 1987년 워홀은 담낭 절제술을 받은 다음 날 심장발작으로 숨집니다. 바스키아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는 워홀을 추모하기 위한 위의 작품 ‘묘비’를 그렸습니다. 버려진 문짝 세 개가 있습니다. 왼쪽에 꽃과 십자가가 있고, 오른쪽에는 하트가 덮여있는 두개골이 있네요. 가운데의 가장 높은 문에는 ‘죽을 운명(Perishable)’이라는 글이 반복해서 쓰여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워홀을 보내주는 것 같습니다. 바스키아는 죽음이 다른 형태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장 미셸 바스키아, 죽음과 합승, 1988, 개인소장
바스키아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1988년 작품인 ‘죽음과 합승’입니다. 이 작품에서 바스키아는 과거보다 표현을 절제하고 기법이 매우 단순해지죠. 부드럽게 조절한 올리브그린색의 배경 위로 갈색의 인물이 손과 무릎 뼈가 따로 움직이는 인간 해골 등에 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가 죽음에 임박해서 그린 것과 별개로 죽음이라는 명확한 주제, 감상주의와 상업적인 요소를 배제해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안타깝게도 바스키아는 워홀을 떠나보낸 후 슬픔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바스키아는 마약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됐습니다. 이미 그는 1985년에도 헤로인에 심각하게 중독된 상태였습니다.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기도 했지만 결국 바스키아는 1988년 8월 12일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였습니다.

1984년 미국 캘리포니아 작업실에서의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화가로 활동한 8년 동안 드로잉 3000여 점과 회화 1000여 점을 남겼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누구보다 강렬한 삶을 살았던 그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스키아 작품의 장점은 미술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아닐까요. 그가 살던 시기 현대미술은 지나치게 개념화되거나 추상화돼 엘리트 중심주의로 흘렀다는 지적을 받았습니다. 바스키아는 쉽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대중과 소통했고, 예술 세계의 중심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냈습니다.

<참고 자료>

-탐라 데이비스(2020), 장 미쉘 바스키아: 더 레이디언트 차일드

-레온하르트 에머블링(2008), 장 미셸 바스키아, 마로니에북스

-Mark Mayer(2010), Basquiat, Merrell Publishers

-크리스티 홈페이지(https://www.christies.com) 속 바스키아 작품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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