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반미, 필리핀 반셋…외노자 위해 '특급 식단' 만든 이곳[르포]
[편집자주]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의 외국인 취업비자 소지자는 92만명을 넘어섰다. 한국은 현재 합계출산율 0.7명대의 인구절벽에 처해있고 2025년에는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할 것으로 보여 외국 노동인력 확대는 '선택'이 아니라 받아들여야할 '현상'이 됐다. 100만 외국노동시대를 앞둔 우리 사회가 '우리 옆 다른 우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는지, 올바른 다문화 시대 조성을 위한 고민을 풀어본다.
# 세 아들의 아빠인 필리핀 노동자 줄리어스 메띵은 매일 새벽 5시, 아침 기도로 일과를 시작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줄리어스는 필리핀에 있는 가족의 건강과 하루의 안전을 기원하고 조선소로 출근한다. 오른쪽 가슴에 필리핀 국기와 '줄리어스'라는 한글 명찰이 달린 작업복을 입고 도장(페인팅) 작업을 시작한다. 페인트가 곳곳에 묻은 작업화와 작업복 차림을 하고 만난 줄리어스는 "한국에 가족을 데리고 와 함께 사는 게 목표"라며 웃었다.
조선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조선업 경기가 최근 되살아나면서 부족해진 일손을 외국인 노동자가 메운다. 도장같은 비교적 단순한 업무부터 사전 교육과 전문 지식이 필요한 용접, 전기 배선까지 다양한 공정에서 외국 일손이 활동 중이다.
줄리어스는 이날 동료와 함께 해외식 메뉴를 선택했다. 바게트빵에 속을 채운 음식은 베트남식 샌드위치인 '반미'를 떠올리게 한다. 감자튀김과 수프, 음료 등을 함께 담아 자리를 찾아 식사를 시작했다. 오전 작업의 고됨을 보여주듯 접시가 금세 바닥을 드러냈을 때 식당 직원은 줄리어스 일행에게 김치찌개 식단의 메뉴였던 제육볶음을 '서비스'로 내밀었다.
HD현대중공업이 '해외식'을 제공하는 건 최근 증가한 외국인 노동자의 입맛을 조금이나마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회사에 따르면 4월 기준외국인 노동자 4300명이 일하고 있다. 인근 같은 계열사인 HD현대삼호 조선소(3400명), HD현대미포(2600명) 등 HD한국조선해양 계열 조선소에만 1만300명의 외국인이 근무한다.
2022년말 기준 3사 합계 외국인 노동자가 4300여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2배 이상 늘었다. 정부가 지난해 조선업 인력난 대책으로 E-9(비전문취업) 비자 쿼터를 확대한 결과다. 줄리어스 역시 지난해 10월 취업비자 확대 때 한국에 들어왔다. 필리핀 막콜로시티에서 2주가량 언어교 육을 받고 한국어 능력시험인 EPS토픽에 합격하면 한국 입국이 가능했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급증에 따라 회사의 맞춤형 지원도 확대됐다. 외국인 노동자가 현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원과 안전교육, 업무 등 각 분야에 통역을 지원했다. 베트남 언어를 하는 통역원만 30명 넘게 일한다. 입사 시 건강검진을 포함한 각종 서류 신고업무를 지원하고 현장 배치 전후 직무교육과 한국어 교육을 시행한다.
조선소 구내식당에선 기존 식단과 함께 해외식(월드키친) 메뉴를 준비한다. 태국요리나 쌀국수, 할랄푸드 등 외국인 노동자가 고국에서 접했던 메뉴들이다. 줄리어스는 "고향에서 먹는 '반셋'(우리 잡채와 비슷한 필리핀 음식)과 '다도보'(필리핀식 갈비) 같은 메뉴를 찾을 수 있다"며 "해장국이나 김치찌개같은 한국음식도 처음엔 매워서 잘 못 먹었지만 지금은 즐길 정도"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3시20분에는 용접파트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교육이 진행됐다. 비교적 단순한 업무의 경우 현장에 바로 투입되지만 용접처럼 상대적으로 기술을 요구하는 작업의 경우 일정 수준이상 실력이 필요한 탓이다.
국내 입국 전 용접 기술을 배운 노동자라도 조선 현장에서 일하고 품질 기준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사내 재교육이 필수라고 한다. 회사 관계자는 "현지에서 용접 교육을 받거나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현장 투입을 위해 4주간 추가 교육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교육에선 한국에 들어온 지 2~4달가량 된 외국인 노동자 12명이 가스절단과 전기용접 실습 수업을 받았다. 작업 자체로도 위험하고 작업결과가 배의 안전성과 직결되는 만큼 "그렇게 (작업)하면 안돼"라며 엄격한 목소리가 오가기도 한다.
베트남 북부 하이퐁 출신의 25살 동갑내기 동네 친구 응웬티 허이투와 웬티투 리에우는 E-7(숙련기능인력) 비자로 HD현대중공업 협력사에 취업해 일하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한국문화에 빠져 2019년 유학을 결정하고 한국 전문대학을 마친 뒤 곧바로 취업해 전기파트에서 교설(엔진에 깔린 전기신호를 연결하는 것) 작업을 하고 있다.
허이투는 "회사에 들어오니 외국인 노동자 그룹이 있고 입사 때 선배들이 도움을 주기도 한다"며 "입사 과정에서도 회사 직원과 학교의 도움을 받아 큰 어려움 없이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리에우는 "입사할 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는데 한국 사람, 베트남 사람 구분없이 동료로 도와주니 불편함이 해소됐다"며 "5년간 한국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두 사람에게 고민을 물으니 "한국에 더 있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리에우는 "현재 E-7 비자로 한국에 체류 중인데 F-2(거주권) 비자로 바꾸는 게 목표"라며 "보다 더 발전한 나라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한국에서 오래 살고 싶고 가족을 초청해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허이투 역시 "F-2 비자를 취득하고 나아가 F-5(영주권)을 얻는 게 가장 큰 목표"라며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일하고 이곳에서 친구를 만들고 가족과도 살고 싶다"고 소망을 밝혔다.
두 사람과 함께 일하는 협력사 지테크의 진은영 팀장은 "팀원 전체 11명 중 4명이 베트남 친구들이라 '험담을 해도 모르니 일할 땐 한국말로만 하자'고 농담도 한다"며 "한국 사원과 함께 섞여 일을 하는데 큰 문제 없이 현재로선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울산=김훈남 기자 hoo13@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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