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다 정말. 선배들 때는 수사하기 쉬웠죠"[조준영의 검찰聽]

조준영 기자 2024. 5. 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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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비밀의 숲'의 한 장면. 검사실에 사건서류가 수북하게 쌓여 있다.


"예전 같으면 정말 민감한 사건도 6개월 안에 다 끝냈다. 요즘 검사들은 밤은 새나 모르겠다."

검찰 고위직을 지낸 서초동의 한 변호사가 지난 10일 검찰의 사건처리 속도가 너무 느리다며 꺼낸 얘기다. 여야 정치인이 얽힌 민감한 정치사건뿐 아니라 일반 형사사건도 검찰이 너무 오래 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수사지연에 대한 지적이 나온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문제는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는 데다 좀처럼 해소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장의 인식은 어떨까.

"전두환, 노태우 구속해서 수사하는 데 딱 49일 걸렸다. 지금은? 같은 수사하면 2년은 넘게 걸릴 것이다."

수도권 지역에 근무하는 A부장검사의 얘기다. 한마디로 '예전엔 안 그랬는데'는 요즘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답답한 말이라는 얘기다. 옛날 얘기를 하기엔 수사환경이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억울한 심경이 절절하게 배어난다.

현직이든 전직이든 사실 검찰 출신은 다 아는 얘기다. 컴퓨터를 현장에서 통째로 뜯어가도 아무 문제가 없었고 계좌내역 영장도 청구하는대로 다 나왔던 시절이 있었다. A부장검사는 "솔직히 옛날엔 수사를 좀 편하게 했다"며 "그때는 가능했고 지금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디지털압수물은 포렌식하는 데 하세월이다. 기업서버만이 아니다. 스마트폰 보안시스템도 암호를 푸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스마트폰 암호를 못 풀어 결국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사례도 익히 알려진 얘기다. 어렵사리 확보한 압수물 중 범죄혐의와 관련된 정보를 선별하는 작업은 또다시 넘어야 할 산이다. 중요사건은 변호인이 매일 붙어 참관을 하는데 수사관과 변호인이 함께 파일을 하나씩 열어보면서 증거를 뽑다보면 수개월이 걸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급하다고 무리하게 속도를 낼 수도 없다. 절차적 정당성을 지키지 않았다고 법원에서 증거가 송두리째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의 수사가 모두 물거품이 된다.

"열심히 조사해서 자백을 받더라도 법정에서 피의자신문조서를 부인하면 휴지조각이 된다. 조서에만 의존할 수 없는 상황이다."(비수도권지검 평검사)

법원은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한다. 자백에 의존했던 기존의 수사관행 대신 과학적 증거를 찾고 법정에서 치열하게 다퉈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검찰의 시각은 다르다. 흩어진 과학적 증거를 짜임새 있게 연결해주는 게 자백 같은 진술증거인데 이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면 수사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몇 배로 늘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검사들 사이에선 사법절차를 이렇게까지 지연해도 되는 것인지 근본적인 회의감이 든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재경지검 B부장검사는 "지난해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단이 1년 동안 48명을 구속 기소했다고 상당한 성과라는 취지의 보도자료를 낸 적이 있는데 예전 같으면 1년에 200~300명 구속이었어야 할 일"이라며 "요새는 압수수색을 철저히 하면 피의자가 준항고를 제기하고 자백을 받으려고 하면 회유, 강요 소리가 나오는 게 유행이 돼서 예전 같은 성과를 내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C부장검사는 "옛날엔 자백을 빨리 받아내는 검사가 훌륭하다고 했지만 요즘은 자백을 받아내는 검사 얘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가 한계점에 다다랐다는 설명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수사기관이 이미 신문했던 질문을 법정에서 하나씩 다시 꺼내 답을 듣는 일이 반복된다. 수사할 때 변소내용이 기소된 이후에 적게는 3배, 많게는 5배까지 늘어난다고 한다.

피고인들은 피해자가 진술한 내용이나 피해자가 제출한 증거를 미리 볼 수 있다보니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무엇인지 사전에 치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시간을 번다. 공판 난도는 올라갈 수밖에 없고 재판은 자연스럽게 길어진다. 1심 구속기간인 6개월을 넘어 피고인이 풀려나는 경우가 흔한 일이 됐다. 풀려난 피고인이 증거를 인멸하거나 공범과 말을 맞출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한 사건을 매듭짓는 시간이 길어지는 사이 검사 책상 위엔 새로운 사건이 또 쌓인다. "검사들이 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만 찾고 조사를 제대로 안 하냐고 하는데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까 잘못된 진단만 나오는 것 같다." 한 5년차 검사의 얘기다. 오늘도 검찰청 책상엔 사건 서류가 수북하다.

조준영 기자 cho@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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