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적인 것들의 감각적인 만남 [주말을 여는 시]

하린 시인 2024. 5. 11.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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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의 ‘특별한 감정이 시가 되어’
손미의 ‘양파공동체’
친숙한 소재에서
상상력이 만들어낸
당황스러운 즐거움

컵의 회화​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
내 피가 돌고

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
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

씻어 엎으면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

난간을 따라 걷자
깊은 곳에서
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
살을 파고
모양을 그리면서

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
문고리가 된다

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책상​

책상다리를 끌고 왔어
웅크리고 앉아 흰 과일을 빗질하는 밤
나무 책상과 내가 마주 본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책상이 걸어 와
내 귀퉁이를 핥는다

그래, 이토록 그리웠던 맛
나를 읽는
책상 이빨
내 몸에서 과즙이 흘러 우리는
맨 몸으로 뒤엉킨다

네 위에 엎드리면
우리는 하나 또는 둘이었지
나무 책상과 내가 응시한다

딱딱한 다리를 끌고
우리는 같은 곳에서 온 것
같다

손미
· 2009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수상
· 김수영문학상 등 수상
·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등 다수

손미, 「양파공동체」, 민음사, 2013.

시집 속에는 악천후처럼 떠도는 감각이 있다.[사진=펙셀]

손미의 「양파공동체」는 제32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이다. 이 시집 속에는 악천후처럼 떠도는 감각이 있다. 독자가 첫번째 감각을 감지하고 있는 사이 감각이 이동해 두번째 감각을 만든다.

다시 독자가 두번째 감각을 감지하는 사이, 감각은 세번째 감각을 만든다. 그런데 감각이 지난 자리에 어둠이 짙다. 그래서 감각은 떠도는 악천후다. 이런 시를 만나면 독자들은 당황스러운 즐거움을 맛본다. 여기인 듯 보이는데 저기로 이동해 있고 저기인 듯 보이는데 공간이 물질로 변해 있다. 시집에 수록된 첫 작품을 보자.

"한 번씩 스푼을 저으면/내 피가 돌고//그런 날, 안 보이는 테두리가 된다/토요일마다 투명한 동물로//씻어 엎으면/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지고//난간을 따라 걷자/깊은 곳에서/녹색 방울이 튀어 오른다/살을 파고/모양을 그리면서//백지 위 젖은 발자국은/문고리가 된다//다른 몸으로 나갈 수 있겠다"
['컵의 회화'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처음에 스푼을 젓는다. 그러자 피가 돌면서 화자가 테두리가 된다. 화자가 테두리라는 장소로 전이된 상황에서 동물성을 띤다. '인간ㆍ테두리ㆍ동물' 세가지가 합쳐지는 순간이다. 이질적인 것을 감각적으로 만나게 했다. 화자가 이번엔 컵(다른 무엇)을 씻어 엎는다. 그러자 갑자기 달의 이빨이 발등에 쏟아진다. 컵과 화자, 달은 상관없는 존재다. 그런데 유관한 존재가 돼 조우한다. 무관한 존재를 유관하게 만드는 감각이 놀랍다.

화자는 또다시 난간을 따라 걷는다. 이 난간을 읽는 순간 컵 위 테두리가 묘하게 연상된다. 컵 위를 걷는 상태라니 불안하다. 컵을 벗어난 줄 알았는데, 다시 독자의 시선을 컵에 집중시킨다. 이번엔 독자의 시선을 시인은 백지로 이동시킨다. "백지 위에 젖은 발자국" 그리고 "문고리".

예상 밖 표현에 독자의 연상은 함정에 빠진다. 물기 있는 컵을 엎어 놓으면 문고리처럼 보이긴 하나, 그것인지 알 수 없다. 그 문고리로 화자는 다른 몸을 꿈꾸며 변화를 갈망한다. 이 시처럼 감각의 전이와 굴절, 그리고 관계나 양상의 변화가 시집 곳곳에 포진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하는 여지가 남지만, 손미의 첫 시집에 담긴 감각은 예상치 못한 지점을 창출하고 떠나는 매력을 지닌다.

손미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화자와 가까운 물질을 시의 대상으로 삼거나 출발점, 또는 전환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창하게 특수한 대상을 제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친숙하고 사소한 물질을 기반으로 진폭이 큰 상상력을 보여준다.

컵, 양파, 우유, 마트료시카(러시아 인형), 체스, 책상, 달력, 기차, 올리브병, 냉장고, 미끄럼틀, 젤리, 피아노, 개, 못 등을 손미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의욕적인 젊은 시인들은 자꾸 의욕이 앞서기 때문에 뭔가 대단한 소재를 찾아 떠나려 하는 속성이 있는데, 손미는 그 반대다. 평범한 소재를 모티브로 해 증폭시키는 대단한 상상적 감각의 소유자다.

[사진=펙셀]

'책상'의 경우 시 속에 중요한 사물은 책상 하나뿐이다. 책상과 화자는 이질적이면서 동질적인 존재다. 낮은 나무 책상을 끌고 와서 화자가 과일을 깎는다. 책상과 '나'는 대응하는 모습으로 마주 본다. 책상은 화자의 귀퉁이를 핥으며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잡아먹히게 될 거야" 하고 충고하며 "그리웠던 맛"이라고 말한다. 책상이 화자를 읽는 순간이다.

이 시에서 책상은 정신적 노동을 강요하는 존재다. 책상은 여러 코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자는 자신과 알맞은 책상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화자는 대응을 포기하고 책상 위에 엎드린다. 그러자 책상과 화자는 "하나 또는 둘"이 된다. 이질이면서 동질이 되는 순간이다. 화자와 책상은 모두 "같은 곳에서" "딱딱한 다리를 끌고" 온 지친 존재라는 점에서 동질이지만, 떨어져 있으면 정신적 노동을 강요하는 책상으로 바뀌므로 이질이 된다.

손미 시인은 뚜렷하게 규정지을 순 없지만 분명 선배 시인과는 다른 감각을 보여준다. 시단의 양상이 다양성으로 변화하고 있는 시점에서 「양파공동체」는 다양성의 한 축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poeth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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