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하는 고려아연, 헤어지지 못하는 영풍

2024. 5. 11.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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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포커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왼쪽)과 장형진 영풍 고문. 사진=고려아연·영풍



고려아연과 영풍이 ‘75년 동업의 상징’을 연이어 끊어내며 결별에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3월 고려아연 정기주주총회에서 배당안과 정관변경안을 놓고 사상 첫 표대결을 벌여 사실상 무승부를 거둔 가운데 전장을 법정으로 옮겨 소송전에도 돌입했다.

영풍이 고려아연을 상대로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문제 삼으며 소송을 제기하자 고려아연은 그간 영풍과 함께 공유하던 기업이미지(CI)를 변경하고 함께 쓰던 서울 논현동 영풍빌딩을 떠나 종로로 본사를 옮기기로 했다. 양측을 잇고 있던 사업적 연결 고리도 하나씩 끊어지고 있다. 고려아연은 영풍과 공동으로 진행해 온 ‘원료 공동구매 및 공동영업’을 종료한데 이어 황산취급 계약까지 종료하기로 했다.

 

 루비콘강 건넌 최 씨·장 씨 갈등

일각에선 고려아연의 결정이 사업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고려아연과 영풍은 그간 협력 관계를 통해 사업적 시너지와 경쟁력을 확보해 왔다. 영풍 측은 “공동구매 및 영업을 중단하면 영풍뿐만 아니라 고려아연도 협상력과 구매력이 낮아져서 양사 모두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결정을 한 것이 아쉽다”고 밝혔다.

반면 고려아연은 그동안 원료 공동 구매 및 공동 판매로 인해 고려아연에 특화된 구매전략과 판매전략을 펼치지 못해 사업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해왔다고 말한다. 계약 종료 발표 이후 고려아연 주가는 연일 상승한 반면 영풍의 주가는 큰 폭의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는 게 고려아연 측 입장이다.

고려아연 최 씨 가문과 영풍 장 씨 가문의 우호적 관계의 상징인 서린상사를 두고도 갈등을 빚고 있다. 현재 서린상사의 지분은 고려아연이 66.7%, 영풍이 33.3%를 확보하고 있다. 서린상사는 고려아연과 영풍의 생산제품을 모두 유통하는 고려아연의 알짜 계열사로 그간 경영은 영풍이 맡고 있었다. 고려아연은 서린상사의 경영권을 되찾기 위해 이사회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

그래픽=정다운 기자



지분 싸움도 현재진행형이다. 현재 최 씨 가문과 장 씨 가문의 고려아연 지분은 32% 내외로 비슷한 수준이지만 양측의 지분 매입이 계속되고 있다. 장형진 영풍 고문의 장남인 장세준 코리아써키트 대표가 지난 3월 26일부터 4월 3일까지 5차례에 걸쳐 고려아연 주식 9300주를 매입하며 보유 주식수를 기존 260주에서 9560주까지 늘렸다.

장 고문의 아내인 김혜경 씨도 지난 4월 400주를 매입, 11만5981주를 보유하고 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도 사촌형인 최내현 켐코 회장이 1500주를 장내매수했고, 최 회장의 모친 유중근 경원문화재단 이사장도 1096주를 매입했다.

비철금속 제련 세계 1위 기업인 고려아연은 지배구조상 재계 28위 영풍그룹의 주요 계열사다. 1949년 황해도 출신의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합심해 영풍기업사를 차렸는데 이는 영풍그룹의 시초다. 장 씨와 최 씨 집안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동업하면서 번갈아 그룹 회장을 맡으며 그룹을 운영해왔다. 고려아연이 설립된 1974년부터 최 씨 가문이 고려아연을, 장 씨 가문이 영풍을 각각 경영하는 확고한 독립경영체제로 운영돼 왔다.

두 집안의 동업 관계는 2세에서 3세로의 승계 작업과 2017~2019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재벌 지배구조 개선 요구에 따라 영풍이 순환출자 고리 해소에 나서면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일련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 이후 지주사 격인 영풍에 대한 장 씨 일가의 지배력이 커진 반면 최 씨 일가의 영향력은 더 약화됐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2010년대 후반 영풍그룹의 순환출자 해소과정에서 최 씨 가문과 고려아연의 배려 속에 영풍의 지배구조가 정비됐는데 이후부터 고려아연의 신사업 추진을 지속적으로 반대했고, 이후 영풍이 고려아연의 지분을 늘리려고 하는 등 독립경영 약속을 여러차례 깨트렸다”고 말했다.

여기에 3세인 최윤범 회장 취임 이후 신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두 집안의 갈등은 더 격화됐다. 고려아연이 신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3자배정 유상증자 방식으로 한화, LG, 현대차 등의 투자를 받아 우호 지분을 확보하자, 장형진 영풍그룹 고문 측도 지분을 매입하며 두 집안 간 지분 싸움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계열 분리 가능성까지 나오며 갈등이 본격화했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풍그룹 사옥에 있는 장병희 영풍 창업주(왼쪽)와 최기호 고려아연 창업주 흉상. 사진=한국경제신문



 

 왜 3대째에서 금이 갔나

고려아연과 영풍의 동업관계는 장형진 영풍 고문과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이 이끈 2대 경영에서는 문제가 없었다. 2대까지는 창업자인 아버지들을 통해 어릴 적부터 동업 정신을 보고 자랐고 사업적 교류도 활발했으며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진다. 서로 의견이 부딪힐 땐 나이가 더 많은 최창걸 명예회장이 양 집안을 중재해왔다.

하지만 3대에 와서는 유대관계를 쌓을 기회가 없었다. 3세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장세준 코리아써키트 대표 모두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돌아와 친분을 쌓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최 회장이 미래 먹거리로 2차전지 소재, 수소, 리사이클링(자원순환) 등 신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커졌다. 신사업 투자를 위해 최 회장 측이 대규모 차입금을 들여왔는데 그간 무차입경영 기조를 갖고 있던 장 고문 측이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장 고문 측은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며 당장 수익을 확보하기 어려운 산업인 만큼 무리한 투자보다는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봤다. 최 회장 측은 신사업 투자를 포함해도 고려아연의 부채비율은 20%대라며, 장 고문 측 요구를 과도한 경영 간섭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려아연과 영풍은 지배구조상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로 서로가 필요한 상황이다. 막대한 자금과 영풍의 결정 없이는 당장 계열분리도 쉽지 않다.

공정거래법상 계열분리를 위해서는 특수관계인의 주식 보유 비중을 상호 3% 미만으로 줄이고 겸임 임원도 없어야 하는데 영풍 측 지분(32%)을 3% 미만으로 줄이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고 영풍 측도 캐시카우인 고려아연 지분을 쉽게 내줄 리가 없는 게 사실이다. 

서울 강남구 영풍빌딩. 사진=영풍



 

 누구를 위한 싸움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회장이 완전 독립에 사활을 거는 이유로 일각에서는 3세 경영인으로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최 씨 가문은 장 씨 가문보다 일가 후손이 많다.

장병희 창업자는 2남 2녀를 두고 아들 2명에게 일찌감치 승계를 마쳤고, 최기호 창업자는 6남 3녀를 뒀는데 큰아들이 일찍 세상을 떴고 이 중 아들 4명이 경영에 참여했다. 최 회장의 부친인 최창걸 명예회장은 창업자의 셋째 아들이다. 최 씨 일가는 형제 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지분을 골고루 나눠 갖고 있다.

일가 친척들이 지분을 나눠 가진 상황에서 최 회장의 고려아연 지분이 1.82%에 불과한 것은 잠재적 리스크가 될 수 있다. 개별로 보면 작지만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이 벌어졌을 때 흩어진 지분을 합치면 충분히 경영권을 흔들 수 있다.

고려아연 측은 장 씨 일가가 전자부문 신사업에 진출했다 실패한 데 이어 본업인 석포제련소까지 최근 17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하는 등 실적 부진에 빠지자 동업자 집안의 고려아연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결국 최윤범 회장 원톱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선 영풍으로부터의 독립, 신사업, 지분율 확대 모두 충족해야 하는 상황인데 이는 최대주주인 영풍과의 협상이 필요한 일”이라며 “법과 원리원칙도 중요하지만 오너 간 진정한 대화를 통해 풀어갈 수 있는 부분은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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