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 중심 방사상 도로 설계…당시 도쿄에서도 못한 일
[근현대사 특강] 1896년 서울 도시 개조 사업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끝낸 뒤 왕비를 살해하고 김홍집 괴뢰 내각을 세워 왕을 포로처럼 궁 안에 가두었다.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일본군이 장악한 경복궁(건청궁)에서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아관파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나라를 새로 일으킬 결심으로 도심에 경운궁을 새로 짓게 했다. 1897년 2월 20일, 왕의 거처 함녕전(咸寜殿)이 먼저 지어져 서둘러 이곳으로 환궁했다. 1년 9일 만이었다.
서자 출신 이채연, 주미공사관서 7년 근무
새 직임을 받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6월 초 청·일 양국 군이 동학 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동시 출병하여 일본군 8000여 명이 서울로 진입했다. 7월 23일 ‘경복궁 침입’ 사건에 이어 25일에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공사관은 농민 봉기 방지 구실로 ‘내정개혁’을 요구했다. 일본공사관이 개혁기구로 세운 군국기무처가 그해 11월(양력) 폐지되고 이어 ‘홍범 14조’ 내각이 구성될 때 이채연은 농상 협판 (차관)을 임명받았다. 전날의 상관 박정양이 학무 대신, 갑신정변 연루자로 ‘대사령’을 받고 귀국한 박영효가 내무대신, 서광범이 법무대신을 각각 임명받았다. 이채연을 포함해 4인은 모두 워싱턴 DC에서 친교를 나눈 사이였다. 이듬해 3월 이채연은 농상 대신의 사무를 대리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농업과 상공업을 신식으로 바꾸는 시도는 미국을 본 그라야 감당할 수 있었다.
고종은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숨어 지내지 않았다.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 도착 다음 날 윤치호를 특별히 학부 협판으로 임명하면서 대신 직까지 수행하게 했다. 왕은 1년 전 1895년 상반기 박정양-박영효 협력 체제 때
「교육 조령」
을 반포하여 “나라의 분개를 풀어줄, 나라의 모욕을 막을, 나라의 정치제도를 닦아나갈” 국민 창출을 선언하였다. (2024.2.3
「근현대사 특강」
) 미국 중등 교육의 지표이던 덕·체·지 3양(養)의 교육 강령을 이 땅에 도입하였다. 그 실현을 위해 ‘학교 설립과 인재 양성에 관한 조칙’(2월) ‘한성사범학교 관제령’(4월)
「소학교 설치령」
(7월) 등을 반포하여 신교육 체제 확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해 10월 8일 왕비 시해 사건으로 일본공사관이 김홍집 내각을 앞잡이로 삼으면서 모든 것이 중단되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오자마자 윤치호를 학부 총책으로 특명한 것은 전날의 정책들을 복구하기 위해서였다. 7월에 농상 협판 이채연에게도 ‘경인 철도 사무’를 특임하였다. 미국인 모스(Morse, J.R.)에게 경인 철도 부설권을 주어 철도를 처음 놓는 일의 정부 측 관리 총책이었다. 미국 자본 도입으로 일본의 침략 질을 견제하는 뜻을 담은 사업이었다. 러시아 공사관 1년 체류 중 고종은 쉬지 않고 외국을 경험한 유능한 신하들을 요직에 배치해 근대화를 도모하였다.
1896년 9월 30일
「내부령」
제9호는 황토현(현 광화문 네거리 근처)에서 흥인지문(동대문)까지, 광통교에서 숭례문까지 도로를 침범한 모든 가가(假家)를 철거하게 하였다. 왕조 초기 도읍을 처음 정할 때 넓게 잡은 도로의 폭 원상(50여 척~70·80척)을 회복하게 하는 조치였다. 1주일 뒤인 10월 6일 자로 농상 협판 이채연이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고종은 이채연을 ‘서울 도시 개조사업’의 총책으로 택했다.
내탕금 20만원 출자 한성전기회사도 설립
새로 지은 경운궁은 중화전을 중심으로 서편은 서양식 건물, 동쪽은 한식 건물들을 배치했다. 동쪽으로 정관헌(靜觀軒) 하나가 서양식이나 이것은 함령전 뒤뜰 부속 건물이었다. 동·서양의 문화를 함께 아우른다는 뜻이다. 경복궁을 비롯한 이전의 왕궁들은 대개 대문이 남쪽에 세워졌다. 광화문, 돈화문, 흥화문 등이 그랬다. 새로 지은 경운궁도 남향의 인화문이 있었으나 동쪽의 대안문(大安門, 현 대한문)이 사실상의 대문 역할을 했다. 동쪽이 곧 방사상 도로 결절점이므로 이쪽이 대문 구실을 했다. 대안문 앞 광장은 왕의 행차 준비나 왕에게 집단 진언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그 광장 앞 멀리 황제의 나라 상징인 원구단이 높이 솟았다. 경운궁을 중심으로 한 ‘서울도시 개조사업’은 대한제국으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였다.
방사상 도로체계는 파리의 개선문 건립 때 처음 등장했다. 나폴레옹 3세 재위 때(1848~1852) 오스만 시장이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중세 도시의 좁은 도로체계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개선문을 짓고 이를 방사상 도로체계의 중심으로 삼았다. 미국의 워싱턴 DC 또한 새 수도로 정해지면서 1800년 프랑스계 엔지니어 피에르 랑팡이 의회와 ‘대통령 하우스’ 두 지점에 방사상 도로체계를 넣는 설계도를 작성했다. 그러나 재정문제로 차일피일 미뤄져 이채연의 공사관 근무 때도 진행 중이었다.
이채연은 미국 수도에 방사상 도로체계가 도입되는 과정을 지켜본 뒤 귀국 후 500년 도읍 한성부를 첨단 도시로 바꾸는 모델로 삼았다. 다행히 경운궁을 새 도시 설계의 구심으로 삼는 작업은 옛 구조를 크게 손상하지 않았다. 종로나 남대문로에 즐비한 상가는 왕조 초기에 모두 나라에서 지어준 것이므로 토지 수용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일본의 도쿄가 1880년대 후반 독일 건축가 빌헬름 베크만을 초빙해 방사상 도로체계를 도입하려다 매입 대상 땅값이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만 것과 대조적이었다. 도쿄의 전차는 비슷한 이유로 서울보다 3년니 늦었다.
필자는 1994년 10월 ‘서울 정도 600년’ 국제학술회의 때 ‘서울 도시 개조사업’을 처음 발표했다. 다음 순서의 영국 레체스터 대학교의 안소니 서터크리프(Anthony Sutcliffe) 교수는 1890년대 후반 서울에 방사상 도로체계가 도입된 것에 대해 놀라워하는 발언으로 발표를 시작했다. 그는 방사상 도로체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로 이 회의에 초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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