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만화는 잊어라…춤으로 그린 초현실주의 회화

유주현 2024. 5. 11.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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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드 스테이지] 국립발레단 신작 ‘인어공주’
시작부터 많이 달랐다. 막이 오르기 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긴 서곡으로 시작되는 게 통상의 전막 발레라면, 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는 음악 대신 미술로 막을 연다. 침묵 속에 막이 걷히면 너울대는 곡선 한 줄로 만든 LED조명이 무대를 가로지르며 푸른 바다를 그린다. 그 위에 역시 LED조명 테두리로 빛나는 직사각형 패널은 배의 갑판을 보여주는 스크린인 동시에 그 안에 홀로 선 ‘시인’이 쓴 동화 『인어공주』의 첫 페이지다.

2005년 안데르센 200주년 기념해 창작

존 노이마이어의 '인어공주'에서 주인공으로 발탁돼 호평받은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조연재.
사랑하는 이의 결혼식을 지켜보던 시인이 눈물 한 방울을 떨군 뒤 바다에 몸을 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음악이 시작된다. 감미롭고 대중적인 선율은 아니다. 스트라빈스키나 슈트라우스 풍의 전위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불협화음은 작곡가이자 지휘자, 시인이면서 시각예술가로 두루 각광받고 있는 여성 예술가 레라 아우어바흐의 창작곡이다. 인어공주의 불안과 고통을 상징하는 신비롭고도 구슬픈 소리는 함부르크에서 지휘자와 바이올린 솔리스트, 그리고 전자기장과 손의 마찰로 소리를 내는 신비한 악기 테레민 연주자까지 데려와 구현했다.

춤이 아니라 미술과 음악 이야기로 시작했듯, 국립발레단 신작 ‘인어공주’는 단순한 무용 공연이 아니었다. 존 노이마이어(84)는 미국 출신으로, 독일 함부르크 발레단 예술감독을 50년 넘게 역임하며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안무가’라 불리는 거장이다. 몇해 전부터 은퇴설이 나왔지만 “아직 나의 창작력의 고점을 기다리고 있다”며 여전히 의욕적이다. 슈튜트가르트 발레단 군무 무용수 시절 노이마이어에게 발탁됐던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은 취임 초부터 그와의 협업을 추진해 왔는데, 마침내 숙원사업을 해결한 셈이다. ‘인어공주’는 강 단장이 노이마이어를 소개하려 애쓴 이유가 저절로 수긍이 가는, 한 차원 높은 예술세계였다.

노이마이어는 인어공주를 안데르센의 분신으로 설정해 시적인 무대를 그려냈다. [사진 국립발레단]
노이마이어는 강수진에게 ‘무용계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브누아 드라 당스를 안겨준 ‘카멜리아 레이디’ 때문에 국내선 드라마발레 대가로 알려졌지만, ‘인어공주’의 안무와 연출은 컨템포러리에 가까웠다. 곡선과 직선, 정사각형과 직사각형 같은 기하학적 도형만으로 만들어내는 바다 속과 갑판, 해변 등 다양한 공간부터 시각을 압도한다. 하지만 그가 “내 모든 작품의 주요 철학은 발레의 인간화, 즉 무용수가 살아있는 감정의 형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듯, 사랑이라는 감정을 형상화 한 무대였다.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어린 시절 시각예술가와 무용가 사이 진로를 고민했다”고 고백하며 “물감 같은 재료가 아니라 무용수라는 인간을 재료 삼는 안무가가 된 건 큰 특권이다. 안무란 음악에 동작을 입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140분간 펼쳐진 공연은 마치 움직이는 초현실주의 회화처럼, 서로 만날 수 없는 세계들을 결합시켰다.

검정 턱시도를 입고 중절모를 쓴 시인과 푸른 하늘은 르네 마그리트의 ‘겨울비’에서 튀어나온 듯, 갑판 위 세상은 20세기 의상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현대무용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구현됐다. 반면 바다 속 세상은 일본 전통예술의 시각적 요소가 이국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노가쿠(能楽)에서 영감을 받은 하카마(袴) 스타일의 의상, 가부키(歌舞伎)에서 얼굴에 화려하게 선을 그려 캐릭터를 드러내는 쿠마도리(隈取)를 한 남성 무용수 곽동현이 표현한 바다마녀, 분라쿠(文楽)에서 인형을 조종하듯 인어공주를 헤엄치게 하는 쿠로코(黒子)의 존재도 인상적이었다. 일본 뿐 아니라 발리 전통춤에서 영향 받은 안무도 동양적이었다. 빠르게 돌고 높게 뛰어오르는 하체 테크닉이 발레의 본질이지만, 물속에서는 부드럽게 물결치는 폴드브라(팔과 상체의 움직임) 중심의 동양적인 춤선으로 바다를 그려냈다.

84세 노이마이어 “창작력 고점 기다려”

노이마이어는 인어공주를 안데르센의 분신으로 설정해 시적인 무대를 그려냈다. [사진 국립발레단]
금지된 사랑이나 희생 같은 불편한 심리를 드러내는 안무는 마냥 아름답진 않았다. 인어공주가 다리를 얻고 고통 속에 걸음마를 떼는 순간의 움직임은 영국 국립극장의 연극 ‘프랑켄슈타인’에서 화제였던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가 떠오를 만큼 리얼했다. 노이마이어는 “인어공주가 인간성을 마주하기 위해 희생을 감내한 만큼 예쁨보다는 본질과 현실을 담아내는 게 중요하고, 정직한 액션이 관객의 진정한 감동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내 작품을 통해 인간의 그리움·실망·행복 등을 떠올렸으면 한다”고 했는데, 인어공주로 발탁된 솔리스트 조연재의 연기도 꽤 절절했다.

클래식 발레 팬들이 고대하는 결혼식 그랑 파드되를 대체할 만한 장면도 있었다. 남녀 2인무 대신 선장과 선원들의 파워풀한 남성 군무가 무대를 꽉 채웠고, 엔딩에 시인과 인어공주가 서로의 그림자가 되는 2인무는 뭉클한 감동을 줬다. 안데르센이 자신의 영혼을 인어공주에게 불어넣고, 인어공주 이야기가 세상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서로를 영원히 살게 한다는 것을 춤으로 그려내는 시 자체였다.

흥미로운 건 안데르센을 투영한 시인의 존재가 막이 열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영혼에 귀속된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인어공주의 금지된 사랑은 당시 동성을 사랑했던 안데르센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게 노이마이어의 해석이다. 시인의 눈물이 인어공주가 되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춤추는 시적인 무대를 완성한 것이다.

이 무대는 세계적인 안무가 활용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했다. ‘인어공주’는 2005년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로열 덴마크 발레단 위촉으로 창작됐고, 20여년간 미국·유럽·일본·중국·러시아 등 세계 유수의 발레단이 리바이벌하고 있다. 덴마크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이 세계 거장의 손에서 동시대 예술로 재해석되어 전세계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만하다. 우리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만 인지하는 인어공주의 원작자 안데르센을 새삼 상기하게 됐듯이 말이다. 노이마이어가 ‘시인’을 무대 위에 내내 붙들어 놓은 이유일 것이다.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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