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 '벌칙' 강수에 중·일 증시 펄펄…자율 맡긴 한국은 싸늘

배현정 2024. 5. 11.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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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밸류업’ 증시 성적표
중국 증시가 날아오르고 있다. 6일 홍콩 항셍중국기업지수(H지수)는 6572.45를 기록했다. 이 지수가 6500선을 돌파한 건 지난해 9월 이후 약 9개월 만이다. 최저점을 기록했던 지난 1월 22일(5001.95)과 비교하면 30% 넘게 상승했다. 중국 증시의 반등은 중국판 기업 밸류업 정책의 영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달 12일 증시 부양을 위해 중국판 밸류업으로 불리는 ‘신(新) 국9조’(자본시장 관리감독과 리스크 강화에 대한 국무원 의견 9개 조항)를 발표했다.

일본 증시도 불타오르고 있다. 한국과 중국이 벤치마킹한 밸류업 프로그램의 원조는 일본이다. 지난 2014년부터 10년이 넘게 자본시장 개혁을 추진해온 일본은 지난해에는 중장기 기업가치 증진 방안을 발표했고, 가치평가 지표가 우수한 기업들로 구성된 ‘JPX 프라임 150’지수도 출시했다. 일본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225는 3월 사상 처음으로 4만 고지를 돌파하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34년 전 버블경제 시절의 역사적 고점을 뛰어넘는 놀라운 비상이다. 10일 기준 닛케이225지수는 3만8229.11로 4만 고지에선 내려왔지만, 그래도 연초(33288, 1월 4일) 대비 15% 가까이 상승한 수준이다.

반면 한국은 침울하다. 2월부터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추진하며 증시 부양에 나섰지만, 밸류업 1·2차 발표 직후에는 도리어 ‘실망 매물’이 쏟아지며 주가가 내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과 증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모두 일본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자본시장에 미치는 영향과 기대감은 다른 양상이다.

그래픽=이현민 기자 dcdcdc@joongang.co.kr
중국의 신 국9조는 상장사의 주주환원 정책 강화를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다. 한국의 밸류업과 두드러진 차별점은 페널티를 통한 강제성을 높였다는 점이다. 신 국9조에는 배당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기업은 대주주의 주식 매각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이번 신 국9조는 자금조달, 불법적인 주식매도, 낮은 배당율, 낮은 상장폐지율 등 오랫동안 투자자들의 비판을 받아온 분야를 정면으로 건드린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밸류업 대상의 확대도 주목할 점이다. 박수현 KB증권 연구원은 “중국 국무원은 지난 1월 국유기업 평가지표에 시각총액을 추가했는데, 이번에 신 국9조를 모든 상장사를 대상으로 시행하기 때문에, 국영기업에 국한됐던 밸류업 트렌드가 민영기업까지 확대된 것이 정책의 큰 변화”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1월 평가지표 변경으로 상장사 시총의 47%에 달하는 국유기업의 역할을 강화한 데다, 지난달 신 국9조로 민영기업까지 밸류업을 확대하며 중국 증시의 하방경직성을 확보하는 중요 계기가 마련했다는 평가다.

밸류업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일본은 아베노믹스 이래 10년간 이어진 장기 프로젝트로 기업 거너번스 개혁을 추진해왔다. 2014년 아베 내각의 경제 책사였던 이토 구니오 히토츠바시대학 교수가 “주주권 강화를 통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토 보고서’를 발표한 것이 시초로 꼽힌다. 이후 2015년부터 도쿄증권거래소(TSE)에 의해 기업지배구조 공시가 의무화됐고, 2022년 4월에는 증시 구조를 재편(프라임·스탠다드·그로스)하면서 각 시장 상장 유지 요건을 강화했다.

상장 조건 불충족 시 해당 기업을 상장폐지할 수 있다는 조항도 명시했다.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밸류업의 효과는 상당했다. 법무법인 세종에 따르면, 2023년 3분기 기준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중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 미만인 기업은 2022년 4분기 대비 180개 줄었다. 타니모토 유카 포브스 재팬 웹 편집장은 “밸류업의 강화로 일본에서 요즘 상장사에 요구되는 부담감은 급속히 높아지고 있다”며 “기업가치의 향상을 하지 않으면 시장에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본질적인 상장 의의를 명확하게 다시 마주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의 밸류업은 이제 첫발을 뗀 만큼 아직 갈 길이 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는 2일 기업 밸류업 지원을 위한 ‘2차 공동세미나’를 열고 기업가치 제고계획 가이드라인을 공개했다. 기업 스스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핵심 지표를 선정해 이를 이행하는 과정까지 제시하는 ‘밸류업 공시’ 가이드라인이 골자다.

하지만 공시 참여 여부는 물론 목표설정 방법까지 모두 자율에 맡겼다. 그러다 보니 기업 밸류업 가이드라인이 공개된 직후 증시는 흘러내렸다. 강력한 유인책은 없고, 기업의 선의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나가하마 도시히로 제일생명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월 한국 밸류업 발표안이 이미 시장의 실망감을 샀음에도 이번 2차 지침안에서도 심도 있는 행보는 보이지 않았다”며 “이달 말 밸류업 최종안을 공개하기까지 더 갈고 닦아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주주환원율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세제 완화 및 상법 개정 등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남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2차 밸류업 발표에선 상장사 공시를 위한 가이드라인은 아주 상세하게 발표됐지만, 상법 개정이나 자사주 소각 등 영향력이 큰 거버넌스 개선 내용은 빠져 있다”며 “정부의 세제 혜택과 국민연금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 제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를 모르는 건 아니다. 지난달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배당, 자사주 소각 등 주주 환원 노력이 증가한 기업에 대해 법인세 세액공제를 도입하고, 배당 확대 기업 주주의 배당소득에 대해선 분리과세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 개정이라는 국회 문턱을 넘어야 하는데, 야권이 반대하고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주식시장의 장기 상승 추세를 만드는 것은 현재 미국 외에는 성공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지난한 과정”이라며 “금융당국 뿐 아니라 기재부, 법무부 등 부처를 초월한 전방위적 협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코리아 디스카운트(증시 저평가) 해소 노력이 단순한 주가 부양에 그쳐선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 교수는 “기업의 경쟁력이 없다면, 정부 주도의 밸류업을 시도한다 해도 결국 단기적 효과에 그치게 될 것”이라며 “일부 이익집단의 함정에서 벗어나 다양한 신산업의 성장을 유도하고, 산업 인재 양성에도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타니모토 유카 편집장은 “일본의 선례처럼 한국도 밸류업의 시행이 주식 시장의 건전화에 더해 기업 가치의 향상, 나아가 경제 발전으로 연결되는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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