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의 나에게] 게으름에 대하여

2024. 5. 1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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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프롤레타리아가 겪는 비참함은 모두 다 노동에 대한 열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둘째, 게으르기 위해 일하거나 일하기 위해 게으른 것은 그리 좋지 않다는 것.

"사랑과 게으름을 노래하느니/ 그 밖에 가질 만한 것은 없다.// 내 비록 여러 나라에 살아봤지만/ 사는 데 별다른 것은 없더라." 야구 중계를 찾아서 보는 요즘의 나는 아내에게 낯선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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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마저 상품이 된 시대
게으름이 권리·미덕이란 역설
게으르기 위해 일하는건 안돼
가끔은 멈추고, 자주 달려야
사랑하는 일엔 늘 부지런하길

아내는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것을 몰랐다고 한다. 알았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연애하면서 같이 야구장을 가보거나 대화 주제로 삼았던 적이 없다. 주말 중계를 진득하게 본 적도 없다.

아내에게 정운찬 교수의 '야구예찬'이나 미국 스포츠 기자 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를 들이밀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브래드 피트의 영화 '머니볼',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도 소용없었다.

야구를 제대로 보지 못한 그 오랜 시간 나의 팀 LG 트윈스는 우승하지 못했다. 무려 29년 동안. 그동안 결혼하고 아이 낳고 아이가 자라서 대학을 졸업했다.

야구는 게으른 스포츠다. 집에서, 소파에서 '보는 야구'는 그렇다. 카우치 포테이토라는 말이 괜히 나왔을까. 눈은 타자와 함께 공을 때리고 홈베이스를 파고들지만 몸뚱이는 그저 숨을 쉴 뿐이다. 발가락으로 리모컨을 돌리는 건 신공(神功)이 아니라 초식(招式)이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권리'라는 글을 접하고 얼마나 좋았던지. 게으름을 적(敵)이라 간주하고 수십 년을 살았는데 그게 권리였다니.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프롤레타리아가 겪는 비참함은 모두 다 노동에 대한 열정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했다. "모든 일에 게을러지자. 사랑하고, 술을 마시고, 게으름 부리는 것만 빼고"라는 레싱의 말도 옮겨 적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한발 더 간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보수를 덜 받더라도 하루에 4시간쯤 일하면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 실업도 없고, 여가도 충분해질 수 있단다.

자기 자신마저 상품이 된 신자유주의 자본의 시대, 모든 일이 프로젝트화되어 투명하게 감시받는 사회에서 게으름이 권리이며 미덕이 되는 역설 앞에서 잠시나마 흐뭇해진다.

그런데 그 잠깐의 시간 후 오래된 교육의 흔적들이 목덜미를 잡는다. 성경에서 자기계발서에 이르는 모든 말씀들. 쉬지 말고 기도하라, 개미를 보고 배우라,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읽고, 침대부터 정리하라 등등. 언젠가 국민강사 김미경 씨를 만나 물었다. 비결이 뭐냐.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연습했다, 20년 넘게. 새벽 4시는 귀신이 나오는, 귀신도 도와주는 시간이다. 박지성과 강수진의 발 사진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 사진에 담긴 시간을, 노력을. 여기서 질문. 그래서 게을러도 된다는 것인가, 게으르면 안된다는 것인가. 정답은 모른다. 다만 세월 따라 몇 가지는 알게 됐다.

첫째, 어느 한쪽으로 몰려가면 안 좋다는 것. 가끔은 멈추고, 자주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온 바에 따라 굳이 비율을 말하자면 1대9, 2대8 정도가 아닐까 싶다.

둘째, 게으르기 위해 일하거나 일하기 위해 게으른 것은 그리 좋지 않다는 것. 어느 한쪽을 목적으로 삼고 다른 한쪽을 수단으로 삼는 건 지양한다. 놀 땐 놀고, 일할 땐 일하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사랑하는 일에는 게으르면 안되고, 게으를 수 없다는 것.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는 '부도덕성(An Immorality)'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랑과 게으름을 노래하느니/ 그 밖에 가질 만한 것은 없다.// 내 비록 여러 나라에 살아봤지만/ 사는 데 별다른 것은 없더라." 야구 중계를 찾아서 보는 요즘의 나는 아내에게 낯선 남자다. 그러나 가끔 게으르고 늘 사랑하는 게으름의 윤리를 알고 있다. 낯섦에도 같이 살 수 있는 이유겠다.

[김영태 코레일유통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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