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가[박이대승의 소수관점](40)

2024. 5. 10.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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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연구자들이 참여한 학술대회에서 한국의 근대화와 탈식민에 관해 발표한 적이 있다. 발표의 핵심 질문은 ‘한국은 어떻게 탈식민의 문제를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는가’였다. ‘한국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여겨지므로, 이제 근대화나 탈식민 따위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가 제안한 결론이었다. 이런 발표를 한 것은 비유럽 지역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피해자였던 나라 중 한국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룬 나라는 거의 없다. 탈식민과 근대화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사람들에게 한국은 일종의 대안 근대화 모델로 인식되기도 한다. 과연 한국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한국식 근대화

한국 현대사에서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따라하기가 아니라 모방의 모방, 끊임없는 변형과 재변형 과정이었다. 한편으로는 유럽을 모방한 일본을 재모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모델과 유럽 모델을 구별 없이 뒤섞었다. ‘우리는 서구 근대를 모방하고 있다’고 모두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원본과 전혀 달라진 모방, 극단적으로 변형된 ‘한국식 근대’를 창조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식 근대화를 이끌어온 힘은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된다. 파괴적 자본주의의 발전과 형식적 민주주의의 수립이다. 물론 다른 힘들도 존재했다. 사회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대안적 근대화를 모색해왔고, 남북의 통일은 오랫동안 ‘근대 국가 수립의 조건’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다른 힘들은 사라지고 자본주의가 변화의 거의 유일한 동력이 됐다. 군사독재가 무너진 후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해온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사실 형식적 민주주의의 발전일 뿐이다. 인민이 인민 자신을 통치한다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은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고, 그 결과 형식적 민주주의는 빈 껍데기가 돼버렸다.

아마도 대다수가 ‘한국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선출하고, 발전된 자본주의를 가지고 있으니 이미 근대화를 이루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근대라는 것은 훨씬 더 다양한 영역과 층위를 포함한다. 지식 생산과 교육 체계, 예술과 지적 생산물, 기술과 물질적 생산 양식, 노동과 사회적 관계, 가족, 개인의 생각, 행동, 심리, 무의식, 섹슈얼리티 등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수준에서 근대화를 고려해야 한다. 각 수준에서 근대라는 말이 지칭하는 것은 모두 다르고, 근대를 구성하는 여러 수준과 요소는 수시로 충돌한다. 하지만 일정 정도 이상의 조화와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근대적 공동체가 지속할 수 있다.

과연 한국은 근대를 살고 있는가

한국은 매일 매일 터지는 사건을 쫓아가기에 바쁘다. 하나의 ‘이슈’가 터지면 모두 그곳에 집중했다가 금방 잊어버리고 다음 이슈가 터지길 기다린다. 이런 단절적인 사건의 연속에서 벗어나 장기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한국의 현재를 바라보자. 한국은 근대적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한국사회의 모든 영역이 나이, 직업, 권력 등으로 위계화돼 있다. 이런 조건에서 근대적 사회관계를 수립할 수 있을까? 존댓말과 반말의 구별이 근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말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다. 한국의 가족제도는 여전히 결혼-성관계-출산의 일치를 전제한다. 결혼 없는 성관계나 출산,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관계, 성관계와 분리된 출산 등은 여전히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근대적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언론에서는 수시로 연예인의 ‘사생활 논란’ 운운하는데, 이는 형용모순이다. 사생활이라면 논란거리가 될 수 없고, 논란거리가 될 수 있다면 사생활이 아니라 공적 생활에 속한 것이다.

한국의 능력 검증은 거의 예외 없이 정량화된 시험에 의존한다. 한국에만 존재하는 수많은 시험, 공채, 고시가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역량을 평가할 제도적 역량이 부재하다는 사실, 사회를 운영할 공통의 표준 규범이 결여돼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과 경제 관계에서는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근대적 윤리 지침이 배제되고, ‘이윤을 위해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라’는 파괴적 자본주의의 규칙이 작동한다. 정치인은 위성비례정당을 만들고 유권자는 거기에 표를 던진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꼼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소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민주주의인가?

이런 광경은 서구적 의미의 근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한국의 이러한 특성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이해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이런 전근대는 존재한 적이 없다. 이는 근대도 아니고 전근대도 아니다. 근대와 전근대의 단순한 혼합도 아니다. 근대와 전근대의 구별을 무력화하는 근대, 서구와 전혀 다른 서구의 모방, 원본을 파괴하고 부정하는 모방물이다.

한국식 근대의 핵심은 고유한 조잡함과 기괴함에 있고, 이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여러 수준과 요소 사이의 일관성과 조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한국이 이른바 선진국 수준의 경제 규모에 도달한 것은 파괴적 자본주의의 논리가 한국식 근대의 조잡함을 틀어막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대학은 공동체 유지에 필요한 지식을 포기하는 대신,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요한 기술적 지식에 모든 것을 바친다. 노동 환경은 비인간적이고 주거는 불안정하지만, ‘부자 되기’를 향한 의지는 개인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으로 기능한다. 재벌은 근대 사회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기업 체계지만, 자본주의의 파괴적 본성을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도구가 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자본주의는 결코 인간 삶의 재생산이라는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삶의 조건을 파괴하고 연료로 삼아 성장한 자본주의가 인간을 재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저출생과 인구 감소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피해자로서 탈식민과 근대화의 독특한 경로를 보여주었던 한국이 마지막에 도달한 것은 자기 소멸이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비극적 역사는 결국 비극적 결말로 끝나는가? 가장 놀라운 점은 자기 소멸에 대한 지금의 무관심이다. 이는 지금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인가, 혹은 파국에 무감각해졌기 때문인가. 이제 우리 모두 자문해 보자. 지금 한국은 어떤 시대,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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