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기자의 책에 대한 책] "중세유럽에선 '왕의 은총' 없인 책을 낼 수 없었다"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5. 1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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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2년 파리에서 출간된 한 선교사의 책 '아메리카의 섬으로 떠나는 여행' 표지엔 저자명이 없다.

책 '검열관들'은 하버드대 도서관장을 역임한 로버트 단턴의 역작으로, 한국엔 2021년 출간된 책이다.

"즐거운 독서였다." "매혹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지금으로 보면 얄팍한 수준의 추천사나 책을 읽은 자의 짤막한 소회에 가까운 문장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을 세상에 선뵈기 위한 저자, 출판사의 수고도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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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대 도서관장 지낸 저자의 '검열의 역사' 역작

1722년 파리에서 출간된 한 선교사의 책 '아메리카의 섬으로 떠나는 여행' 표지엔 저자명이 없다. 저자가 익명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던 위험서적은 아니었다. 그의 이름이 책 본문에 등장해서다.

그런데 이 책의 첫 부분에는 '왕의 특허(privilege)를 받음'이란 문구가 나온다. 저자 이름보다 중요했던 건 왕의 허가였다는 얘기다. 단순허가도 아닌 특허권을 부여받아야만 책 출간이 가능했다.

책 '검열관들'은 하버드대 도서관장을 역임한 로버트 단턴의 역작으로, 한국엔 2021년 출간된 책이다. "정부 관리들은 밀실에서 글을 검토해 출판을 허용하거나 금했다"는 포문으로 단턴은 책을 연다.

중세시대 유럽에 출간된 서적엔 당대 검열관들의 글이 표지 바로 뒷장부터 이어졌다. '아메리카의 섬으로…'도 그랬다. 이 책을 검토한 4인의 검열관들은 쓴다. "즐거운 독서였다." "매혹적인 요소가 가득하다." 지금으로 보면 얄팍한 수준의 추천사나 책을 읽은 자의 짤막한 소회에 가까운 문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 검열관의 하품 나오는 문장은 '특허'를 결정할 중대한 요소였다. 왕의 특허는 '은총'이었다. 이단적 상상에는 은총이 불허됐으니, 검열관들은 독점적 권력자였다.

18세기 출판의 역사를 들여다본 저자 단턴의 눈은 19세기 영국 통치하의 인도를 바라본다(제2부).

영국인들이 식민지 인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출판 허가 요소는 놀랍게도 '문체'였다. 검열관들은 현지인들의 문학작품을 그야말로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며 문체의 충실도를 고집했다.

그들은 저자의 언어학적 역량을 집요하리만치 확인했는데, 고전 인용시 번역이 틀렸거나 잘못 쓰인 단어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전통적인 문체'가 아니면 저자를 몰아세웠다.

"무슬림이지만 벵골어를 쉽게 쓰고 있고, 뛰어난 어휘구사력을 보유했다. 하지만 문체는 문법에 맞지 않고, 문학적 품격이 없다."

영국인 검열관의 불가해한 집착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그들이 영국령 인도가 고대의 고전적인 순수성의 계보를 이어 탄생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고대로부터의 순수성을 저해하는 건 영국과 인도의 '합작품'인 당대의 영국령 인도를 훼손하려는 시도로 간주됐다.

21세기 들어 서점가에 쏟아지는 책은 패스트푸드다. 빠르게 소비되고 더 빠르게 잊힌다. 그러다 보니 한 권의 책을 세상에 선뵈기 위한 저자, 출판사의 수고도 과거보다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인간의 '책 읽을 자유'는 인류사에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유로운 독서는 책에 자유라는 유전자를 끼워 넣으려 했던 누군가의 투쟁, 권력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려던 반역자의 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출판계는 책의 천국이자 책의 지옥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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