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앞 밤새우며 ‘철통 호위’ … 임금의 신뢰·총애 받은 ‘꿈의 직장’[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2024. 5. 10.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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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 (27) 무관 선호도 1위 ‘선전관청’
초기엔 정식기관 지정 안 돼
베일에 싸인 채 왕 신변 보호
수장 정 3품, 부하는 종6·9품
70~80명… 고종 19년에 폐지
선전관청 수장이었던 변경우
“백인걸 후손 쫓아내야” 상언에
정조 ‘임금 업신여긴다’ 판단
되레 변경우 내쳐 서열정리도
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 왕의 목숨을 지키는 사람들

조선 시대 문관들이 가장 선호한 직장이 홍문관이었다면 무관들이 가장 선호한 직장은 선전관청(宣傳官廳)이었다. 관리들의 직장 선호도는 왕과의 거리에 비례했다. 홍문관이 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문관들의 관청이었다면 선전관청은 왕과 가장 가까이하는 무관들의 관청이었던 것이다.

선전관청의 임무는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국왕의 신변을 지키는 것이었다. 선전관청의 선전관들은 심지어 국왕이 잠든 사이에 침실을 호위하는 역할까지 했다. 국왕은 그들에게 목숨을 맡겨두고 잠드는 셈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국 초에만 하더라도 선전관청을 정식 기관으로 두지 않았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도 단지 8인의 관원 수를 둘 수 있는 곳으로 규정되어 있었고, 그것도 계약직에 해당하는 체아직이었다. 그리고 경국대전 이전에는 아예 선전관에 대한 법적인 규정 자체가 없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자면 조선 초에는 임금의 목숨을 지키고 명령을 전달하는 선전관들이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었다는 뜻이다. 임금이 가장 신임하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을 관직과 관계없이 임금이 자의적으로 선택해 주변에 배치했던 것이다. 또한 그 자격이나 숫자도 명시적으로 정해놓지 않고 신분에 상관없이 임금이 믿고 곁에 둘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지명할 수 있었다. 심지어 환관도 선전관을 지명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선전관은 임금이 가장 총애하고 신뢰하는 무관이었을 수밖에 없었고, 무관이면 누구나 선전관이 되길 원했을 것이다. 이는 곧 선전관이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선전관청이라는 기관을 탄생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선전관청이 정식 관청이 되면서 선전관은 계약직인 체아직에서 벗어나 정직이 되었다. 선전관청은 ‘속대전’엔 정3품 아문으로 명시되었고, ‘대전통편’엔 선전관청의 임무가 명확하게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대전통편’에는 선전관청의 임무를 형명(形名: 깃발이나 북 등으로 군대의 행동을 호령하는 신호법), 계라(啓螺 : 왕의 거동 때 북이나 나팔을 치거나 불던 일), 시위(侍衛)·전명(傳命, 명령 전달) 및 부신(符信,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신패)의 출납을 장악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선전관은 규정에 따른 이러한 임무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호위하고 목숨을 지키는 것을 가장 중한 소임으로 여겼다. 그들은 임금 앞에서 유일하게 칼을 소지하고 근무할 수 있었기에 임금이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존재였다.

선전관청의 구성원은 때에 따라 변화가 많았지만, 법상으론 ‘속대전’엔 21인, ‘대전통편’엔 24인, ‘대전회통’엔 25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소수 정예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이들 정예 무관들은 왕과 나라의 안위를 맡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따라서 무관이라면 누구나 선전관이 되고 싶은 것은 당연했고, 경쟁도 치열했다.

선전관의 숫자는 겸선전관(兼宣傳官)을 합쳐 대략 70인에서 80인 사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속대전’에 의하면 선전관청의 선전관은 21인이었는데, 수장은 정3품 당상관인 행수 1인, 그 예하에 종6품 참상관 3인, 종9품 참하관 17인을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 외에도 종6품의 문신이 겸하는 선전관 5인과 종6품의 무신이 겸하는 선전관 38인, 종9품의 무신이 겸하는 선전관 12인 등 겸선전관 55인이 별도로 있었다.

선전관청에 관한 세심한 내용들은 선전관청의 일기인 ‘선청일기’에 남아 있는데, 현재까지 존속하는 ‘선청일기’는 정조에서 고종 대에 걸쳐 작성된 106책이 있다. ‘선청일기’가 고종 대까지만 작성된 것은 선전관청이 1882년(고종 19년)에 혁파되었기 때문이다.

# 왕과 힘겨루기도 마다하지 않는 선전관청 행수

정조 8년(1784년) 5월 4일, 병조에서 정조에게 이런 말을 올렸다.

“선전관 백경주는 본청의 가부가 순(順)하지 못하니 예에 의해서 태거하소서.”

태거란 곧 내쫓으란 말이었다. 백경주를 쫓아내는 이유는 선전관에 부합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경주를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는 본청, 즉 선전관청이다. 말하자면 선전관청의 우두머리인 행수가 백경주를 선전관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했고, 이를 병조에서 받아들여 정조에겐 상언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정조는 노기를 드러내며 명했다.

“조금 전 장신(將臣)의 말을 듣건대, 백경주는 바로 백인걸의 9대손이라고 한다. 백인걸이 어떠한 명인인데 8대, 9대는 물론하고, 비록 10대, 20대라 하더라도 그 자손인 자가 어찌 명환(名宦)이 되지 못할 염려가 있겠는가?

문관이면 당년록(當年錄)에 실어야 하고, 무관이면 남항(南行)의 천거에 들어야 한다. 현재 본청의 여러 인원 가운데 현조(顯祖)가 백경주보다 더 훌륭한 자가 있는가? 그 청에서 정축(定軸, 재상을 임명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가부가 어렵다고 하니, 일의 놀라움치고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옛날 선조(先祖) 갑자년에 선전관의 가부가 불순한 일로 인하여 16인이 참여하여 의론하다가 임문(臨門)하여 대처분(大處分)을 한 일까지 있었으니, 어찌 오늘날 우러러 계술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 선전관의 일이 편당(偏黨)하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처럼 엄격하게 처분함이 계셨는데, 이번에는 본정(本情)이 조금 차이가 있어서 우선은 말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대개 상량(商量, 헤아려 생각하다, 딴생각을 하다)함이 있어서이다. 행수(行首) 변경우를 태거하라.”

정조는 선전관청 행수 변경우가 백경주를 선전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는 이유를 백경주의 조상 때문인 것으로 파악했다. 백경주의 9대조가 백인걸이라는 인물인데, 백인걸은 중종에서 선조 대에 활동한 뛰어난 문인이었다. 하지만 그 집안이 정조 당대에는 큰 권세를 누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래서 선전관청 행수 변경우는 그의 9대손인 백경주를 남항선전관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에 정조는 무섭게 화를 내며 백경주가 아주 훌륭한 집안의 후손이라며 선전관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되레 백경주를 내치려고 한 선전관청의 정3품 당상관이자 우두머리인 행수 변경우를 내쳐버린 것이다.

정조가 변경우를 내쫓은 것은 변경우가 선전관의 선택은 선전관청의 권한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는 변경우가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면으로 백경주를 선전관으로 임용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며, 그런 이유로 백경주를 내쫓으려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백경주가 아닌 변경우를 내치도록 결정한 것이다.

사실, 이 사건엔 왕인 정조와 선전관청 행수 변경우 사이에 보이지 않는 힘 싸움이 전개되고 있다. 변경우는 비록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선전관을 뽑는 문제는 선전관청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고, 정조는 그런 입장을 가진 변경우를 괘씸하게 여겨 아예 행수 자리에서 내쫓아버린 것이다.

이렇듯 선전관의 자리는 단순히 신하들끼리의 권력 다툼뿐 아니라 왕과 선전관청 사이의 긴장 관계까지 연출할 정도의 민감한 관직이었던 것이다.

작가

■ 용어설명 - 체아직(遞兒職)

정해진 녹봉 없이 계절마다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녹봉을 지급하는 관직. 직전은 지급되지 않았으며, 대부분 거관(去官) 이후 체천(遞遷)될 자리가 없는 경우 체아직에 임명됐음. 조선 시대의 관직에는 실직과 산직이 있었고, 실직에는 녹관과 무록관이 있었는데, 녹관은 정직과 체아직으로 구분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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