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왜 아이돌의 라이브 실력에 집착할까? [K콘텐츠의 순간들]

김윤하 2024. 5. 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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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분 공연에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하지 못한 르세라핌 멤버들은 호흡조절에 실패하며 무너졌다. 같은 소속사인 하이브 신인 그룹 아일릿의 무대까지 소환되며 분위기는 악화됐다.
4월20일 르세라핌 멤버들이 미국 인디오 사막에서 열린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의 2주 차 공연을 펼쳤다. ⓒAP Photo

과장을 조금 보태 가수와 라이브라는 단어를 21세기 들어 가장 많이 들은 지난 몇 주였다. 도화선이 된 건 4월13일 미국 인디오 사막에서 열린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 무대에 선 그룹 르세라핌이었다. 데뷔 2년이 채 되지 않은 그룹으로는 이례적으로 코첼라라는 대형 음악 페스티벌에 초대된 이들은 설렘과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모습으로 몸을 내던지듯 무대에 등장했다. 대표곡 ‘안티프래자일(ANTIFRAGILE)’ ‘피어리스(FEARLESS)’ ‘더 그레이트 머메이드(The Great Mermaid)’를 연결한 몰아치는 초반 구성이나 밴드 라이브로 준비한 연주까지, 페스티벌을 찾은 불특정 다수 관객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된 모습이었다.

안타까운 건 그 만반의 준비와 넘치는 기세를 무대 완성도가 뒷받침해주지 못했다는 점이다. 같은 장소에서 2주 동안 같은 라인업으로 열리는 코첼라 페스티벌 1주 차 공연에서 르세라핌은 분명 사람들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연말 시상식 등 대형 무대를 거치며 퍼포먼스로 인정받아온 그룹이기에 아쉬움의 후폭풍은 더욱 거셌다. 가창에 집중이 필요한 순간에도 격렬한 안무가 계속되었고, 40분 공연에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하지 못한 멤버들은 호흡조절에 실패하며 무너졌다. 그렇게 무너진 공연 후반부를 중심으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 같은 소속사인 하이브 신인 그룹 아일릿이 음악방송 1위 이후 불안정한 음정으로 소화한 앙코르 무대까지 함께 소환되며 분위기는 더욱 악화됐다.

바싹 마른 들에 불씨가 날아 앉은 것처럼 점점 커지는 불길을 보며 문득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크 하나가 떠올랐다. 보통 TV 화면 우측 상단에 자리 잡고 있던 은색 CD 알판이었다. 소싯적 가요 프로그램 좀 봤다는 사람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이 마크는 화면 안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지금 실제로 노래하는 게 아니라 노래하는 척을 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립싱크’ 마크였다.

립싱크는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에 걸친 가요계의 큰 화두 가운데 하나였다. 립싱크가 뜨겁게 부상한 건 1990년대를 기점으로 춤을 추며 노래하는 댄스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1992년, 데뷔와 동시에 가요계를 정복한 서태지와 아이들의 폭풍 같은 인기와 더불어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중심으로 성장한 재능 있는 프로듀서와 댄서들이 가요계에 밀물처럼 모여들었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곱게 한 소절 뽐내던 가수들의 자리는 색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댄스가수들로 빠르게 채워져갔다. 립싱크 마크는 그런 변화의 흐름 속에서 태어났다. 실제 가창자와 무대에 선 가수가 달랐던 그룹 마로니에의 립싱크 사건을 신호탄으로 ‘댄스음악이 한국 가요계를 망친다’는 꾸준한 미디어의 공격에 힘을 받아 탄생한 이 궁여지책은 라이브를 하지 않는 가수에게 붙은 굵직한 주홍 글씨였다.

‘사랑받은 모든 가수가 명창은 아니었다’

당시 이 수치스러운 낙인을 없애기 위해, 또는 100% 라이브를 지향하는 음악 프로그램들의 탄생으로 어쩔 수 없이 헐떡거리며 춤과 노래를 하는 가수를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는 사람만큼이나 보는 사람도 고통스러운, 도대체 누구와 무엇을 위한 라이브인가 의문스러운 시간을 지나 가요계는 다음 스텝을 밟아나갔다. 조성모, SG워너비 등 가창으로 승부를 보는 가수가 꾸준히 데뷔하는 한편 새롭게 데뷔하는 신인 댄스가수들의 경우 전보다 공들인 체계적인 연습 과정을 통해 춤추면서 노래도 할 수 있는 신기술을 습득해나갔다. 2000년대 중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케이팝 아이돌 가수 대부분이 후자의 사례에 속한다.

물론 똑같이 노력해도 결과가 다 같을 수 없었다. 그 덕분에 립싱크 마크가 사라진 뒤에도 라이브 검증 절차는 변함없이 유행했다. 칼자루가 방송사에서 대중으로 이관되었다는 것만 달랐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케이팝 ‘MR 제거 영상’이 대표적이다. MR 제거 영상이란 일반적으로 라이브에서 사용하는, 원곡에서 보컬을 제외한 인스트루멘탈 즉 MR을 원본에서 삭제해 재제작한 영상을 말한다. 이 영상은 첫 등장 이래 지금까지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특히 케이팝 아이돌 가수의 실력을 판단하는 시청각 자료로 국경을 넘어 널리 활약하고 있다. 케이팝 1세대에서 아직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5세대까지, 이 오랜 전통문화의 섬세한 거름망을 피해간 이는 아무도 없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까지 가수의 가창, 정확히는 라이브에 집착할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영원불멸의 대답이 하나 존재하기는 한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가수’이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처럼 더 이상 어떤 반박도 불가능할 것 같은 답변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반항의 문장 하나가 고개를 든다. ‘사람들이 사랑한 모든 가수가 명창은 아니었다.’ 노래나 라이브는 조금 부족해도 아름다운 가사로, 특유의 아우라로, 감탄을 자아내는 퍼포먼스로 수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전한 가수의 얼굴이 시대별로 얼마든지 떠오른다. 가창과 라이브는 분명 가수의 중요한 자질이자 덕목이다. 그러나 오로지 그것만이 자격의 근거가 되면, 우리는 음악이라는 큰 놀이터가 주는 재미의 많은 걸 놓칠 수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선 르세라핌은 코첼라 2주 차 무대에서 전 주보다 성장한 모습을 보였다.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밴드 연주와 목소리의 균형도, 라이브 AR과 포인트 안무의 조화도 한층 매끄러워진 모습이었다. 가수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다만 전보다 나아진 것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만이 살아남을 터이다. 대중음악의 긴 역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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