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축은 정부 실책과 책임을 다수에게 전가하는 책임회피"

송광호 2024. 5. 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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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이 만든 불평등한 역사…美 진보 경제학자가 쓴 신간 '자본 질서'
세계 각국의 통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3월. 민주당 뉴욕 주지사 앤드루 쿠오모는 저소득 의료보험 지출분 4억달러를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여러 사람이 충격에 휩싸였다. 뉴욕주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의 병원비를 줄이겠다는 공언이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긴축의 칼날이 공립학교 예산으로 확대될 것으로 점쳐졌다.

미국뿐 아니다. 칠레에선 지하철 요금 인상이 발표됐고,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그리스는 제일 먼저 공공지출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연금액을 삭감하고, 알짜 항구 열곳을 민영화했으며 공무원 급여를 깎았다.

긴축에 반대하는 그리스 노동자들 [EPA=연합뉴스]

재정 부족에 시달리는 정부가 공공서비스부터 줄이는 건 익숙한 풍경이다. 정부는 사정이 어려우니 모든 사람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쓸 수 있는 돈을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긴축 정책을 시행해야 할 때마다 각국 정부가 거의 동일하게 주장하는 논리다.

그 주장 뒤에 잇따르는 정책은 가혹하다. 공교육·의료보험·실업수당 등의 예산을 삭감하고, 임금 상승을 억제하며, 민영화를 추구하는 한편, 고용규제를 완화하는 게 일반적인 긴축의 스텝이다. 힘들지만 그간 방만하게 썼으니 좀 아끼자는 주장에 토를 달기는 쉽지 않아, 많은 이들이 정부 정책을 마지못해 따라간다.

국립대 예산을 줄이는 것에 반대하는 아르헨티나 시민들의 시위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러나 이 같은 고통을 야기하는 긴축은 소수의 기득권이 만들어낸 거짓말과 같다고 미국의 진보성향 대학 '더뉴스쿨' 경제학과의 클라라 E. 마테이 교수는 주장한다. 그는 신간 '자본 질서'에서 긴축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중요한 보루"라고 강조한다.

책에 따르면 긴축이란 "정부와 엘리트층의 실수와 책임을 다수에게 전가하는 책임 회피이며 소수의 부유층만을 위한 정책"이다. 이득을 보는 자들을 추적해보면 대의(大義)에 깃든 거짓말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법인세를 인하하고, 공적 영역을 민영화로 전환하고, 복지를 축소할 때 이득을 보는 이들이 누구냐며 직격한다.

[연합뉴스 TV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저자에 따르면 소득이 낮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높은 세금을 부담하는 '역진적 조세 정책' 탓에 공공재 비용 부담은 오랫동안 불평등하게 돌아갔다. 또, 사회 전 계층이 부담하는 소비세가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상위 소득 계층에 대해 수십 년간 어마어마한 규모의 감세가 이뤄졌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기(1953~1961년) 동안 91%였던 상위 소득세율은 2021년에 37%로 크게 줄었다. 법인세율은 1970년대 50%였는데 트럼프 행정부 시절에는 21%로 뚝 떨어졌다.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자본주의와 파시즘의 역사를 추적하고서 긴축의 의미를 살펴본 끝에 '긴축'이란 정부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경제를 장악하고,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21세기북스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그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문화'와 '법'을 이용한 통제다.

정부는 '당신이 가난한 이유는 돈을 펑펑 쓰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은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게으르고 사치를 부리는 시민들이 경제를 망친다'와 같은 논리를 지속해서 주입했다. 그 결과, 시민들은 자신이 가난한 이유를 부조리한 정책에서 찾지 않고, 절약하지 않는 소비 습관에서 찾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정부는 '재정 긴축', '통화 긴축', '산업 긴축'을 쉽게 주무를 수 있도록 법률을 정비해 나갔다. 이처럼 사회 문화와 법망을 타고 발전해 나간 정부의 긴축 정책은 시간이 흐를수록 교묘해졌고,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인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긴축이 임금, 실업, 생활 수준에 미치는 파괴적 영향은 긴축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해야 할 강력한 근거가 된다. 그런데도 전혀 의문시된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긴축이 추진된 동기가 근본부터 정치적이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를 완전히 복구해 자본 축적을 원활히 하고 특히 소수 지배층에 부를 집중하려면 다수의 민중을 종속시키는 게 선결과제다."

21세기북스. 임경은 옮김. 492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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