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北 핵과학자는 특급 대우? 폭탄의 노예로 살다 죽어나가”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2024. 5. 1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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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전략가 콜린스, 보고서 발표
북한 김정은이 지난 2017년 3월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 지상분출시험을 참관한 뒤 국방 과학·기술 책임자로 추정되는 관계자를 등에 업고 있다. /조선중앙TV 연합뉴스

“북한의 핵 과학자들은 초등학생 나이 때부터 연구 분야, 주거, 취식, 결혼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인생 경로가 정해져 있는 자기 결정권이 없는 존재다. 실패가 곧 불충(不忠)인 북한 사회에서 ‘조국의 과업’을 위해 일만 하다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비인간적 상황 아래 있다.”

핵·미사일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북한은 김정은이 나서서 핵과학자들을 업어줄 정도로 우대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이와 딴판이라는 분석이 미국 워싱턴 DC의 한반도 전문가로부터 제기됐다. 북한의 핵 관련 전문 인력 숫자는 약 1만명으로 추정된다.

로버트 콜린스

31년간 주한미군에서 복무하며 한미연합사령부 최고 전략가 등을 지낸 로버트 콜린스는 10일 발표하는 보고서 ‘폭탄을 위한 노예(Slave to the Bomb): 북한 핵과학자의 역할과 운명’에서 이들의 인권 침해 실태를 상세하게 조명했다. 그가 면담한 탈북민들의 증언과 각종 비공개 자료 등을 토대로 이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다. 콜린스는 “외부인들은 김정은과 북한의 생존에 핵이 너무 중요해 과학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며 “최고 지도자가 미국 본토까지 때릴 수 있는 정교한 무기 개발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핵과학자들은 성공 말고 다른 퇴로가 없는 위험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본지가 사전 입수한 200여 쪽 분량의 보고서 내용을 보면 이른바 ‘폭탄의 노예’로서의 운명은 이르면 열 살도 되지 않는 나이에 결정된다. 북한은 시골, 도시 할 것 없이 행정 단위별로 수학·과학에 우수한 인재들을 ‘중앙’으로 선발할 수 있는 체계를 갖고 있다. 콜린스는 보고서에서 “지역별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수학·과학·물리 등 과목별로 영재 교육을 시킨다”며 “두각을 나타내면 온 가족이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강제로 이사를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김정일이 다닌 평양 신원동의 ‘제1중학교’는 영재 교육의 산실로 북한 전역에서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모여든다. 학생들이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 등에 꾸준히 참여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그래픽=박상훈

핵 프로그램 종사가 확정된 과학자 자원들은 평양의 김일성대·김책공대, 자강도 강계공업대 등 주로 5개 대학에 진학한다. 보고서는 “한 번이라도 특정 연구 분야에서 훌륭한 학문적 성과를 내면 전문가로서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며 “반드시 김씨 정권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하고, 이때부터 인생의 변수라 할 수 있는 건 근무 장소나 그에 따른 주거의 품질 정도”라고 했다. 이에 따라 혼인 상대도 사실상 결정돼 ‘선택의 자유’가 없는데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고 각종 혜택이 박탈된다”고 했다. 여러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공부할 기회도 주어지는데 러시아의 합동원자핵연구소(JINR), 중국 하얼빈 공대 등이 대표적인 교류 기관이다. 하얼빈 공대에서 수학한 북한 학생은 코로나 팬데믹 이전엔 한 해 1000명이 넘었다.

핵 과학자로서의 삶의 질은 근무지가 어디냐에 달려 있다. 북한 내 핵시설은 100곳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콜린스는 “이들 중 40곳 정도가 추후 비핵화 과정에서 반드시 언급돼야 할 핵심 시설들”이라고 했다. 핵 연구·감독 시설 15곳, 우라늄 광산 8곳, 핵 발전소·정제 공장 5곳 등이다. 이른바 ‘성분’이라 불리는 출신 배경에 따라 근무지가 정해지기도 한다. 가장 험지로 꼽히는 기피 대상은 최북단인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일대라고 한다. 2006년부터 2017년까지 6차례 핵실험이 벌어진 곳이다.

북한의 원자력 관련 법에 ‘국가가 종사자들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돼 있지만, 수사(修辭)에 그칠 뿐 기본적인 안전 시설조차 갖춰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원자력공업부 등에서 일한 뒤 1994년 탈북한 김대호씨는 “핵개발 분야 종사자들이 우라늄 탱크 속으로 내몰리고, 우라늄 분말·먼지가 무수히 떠다니는 공간에서 호흡하며 살인적인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고 했다. 보고서에는 “분강지구 물리전문대학 출신 100여 명이 인근 영변 핵시설에서 일하다 방사능에 노출돼 정신이 이상해지고, 가족들은 불임·기형아 문제를 겪다 차례로 죽어나갔다”는 사례도 소개됐다. 실제로 관련 분야에 종사했던 탈북민들이 맹독성 가스와 방사능 피해로 인한 백혈구 감소증, 간염, 고환염, 신장염 등 각종 ‘직업병’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2017년엔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지하 갱도를 만드는 공사 중 붕괴 사고가 발생해 수백 명이 매몰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김정은 앞에서 박수치는 北 과학자들 - 김정은(앞줄 왼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딸 김주애(앞줄 오른쪽)가 2022년 11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발사 성공 후 개발에 기여한 과학자 등에게 박수를 받고 있다. /노동신문 뉴스1

상당수 핵과학자들의 경제적 사정도 녹록지 않다. 김정일 집권 때는 이들이 모여 살던 평양 국가과학원 앞 주거 단지가 ‘발효 아파트’라고 불렸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부업까지 할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핵과학자들이 자가 소비 또는 판매를 위해 옥수수·도토리 등으로부터 알코올을 추출했기 때문이다.

북한 체제 특성상 핵과학자들에 대한 당의 감시와 통제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각 연구 기관은 물론 핵시설마다 당 위원회가 있어 끊임없이 과학자들을 감시하고 충성도를 시험하는 구조”라고 했다. 각자 연구를 열심히 하더라도 협업을 위한 교류는 철저히 금지된다. 한 개발자는 연구 중인 내용을 주변에 공유했다가 가족들이 모두 체포되는 변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보고서는 “북한 정권이 더 많은 주민에게 혜택이 갈 수 있는 방식의 원자력 이용은 하지 않고 있어 핵 과학자들은 무기를 만들고 핵 프로그램 인력을 교육하는 일밖에는 할 게 없다”고 했다.

다만 김정은 집권 후 핵·미사일 등 무기 개발 과정에서 실패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일부 형성된 것은 사실이라고 콜린스는 밝혔다. 북한은 2017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에 성공한 후 김정은이 과학자를 직접 업어주는 사진을 공개했다. 보고서는 “1984년부터 2017년까지 북한 지도자들이 총 119차례 ‘현장 방문’을 했는데 이 중 83차례는 김정은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콜린스는 10일 워싱턴 DC의 대북 인권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 행사에서 줄리 터너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번 보고서 내용을 발표할 계획이다. 주한미군 출신인 데이비드 맥스웰 HRNK 이사는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인권 문제 제기를 삼가야 한다는 건 타파해야 할 생각”이라며 “국제사회, 특히 한국과 미국은 북한 핵 프로그램의 핵심 요소인 과학자들의 인권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김씨 일가가 책임을 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로버트 콜린스

37년간 미국 군인과 군무원으로 일한 한반도 전문가. 경력 가운데 31년을 주한 미군에서 복무했고, 한미연합사 최고 전략가로 4성 장군인 연합사령관을 보좌하며 정치 분석과 기획 등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때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메릴랜드대에서 아시아 역사학을 전공했고 단국대에서 북한 정치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워싱턴 DC의 대북 인권 단체인 북한인권위원회(HRNK) 선임고문으로서 북한 인권 문제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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