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싶었다”는 전세사기 피해자…법률 지원도 못받았다

정윤경 기자 2024. 5. 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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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번째 사망자 “40만원 필요하다” 법무사 말에 발걸음 돌려
“억울하고 비참” 구제·지원 한계 속 피해자 ‘죽음’으로 절규

(시사저널=정윤경 기자)

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 등이 5월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 '여덟번째 전세사기 희생자 추모 및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눈물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괴롭고 힘들어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빚으로만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국민도 사람도 아닙니까? 너무 억울하고 비참합니다. 살려 달라 애원해도 들어주는 곳 하나 없고 저는 어느 나라에서 사는 건지. 돈 많은 시민만 살 수 있는 나라입니까. 저도 잘 살고 싶었습니다."

5월1일 대구 남구 남영동에서 전세사기 피해자 김효진(가명·38)씨가 이 같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씨는 2019년 전세보증금 8400만원을 내고 남편, 자녀와 함께 남영동의 다가구주택에 입주했다. 그러던 지난 2월, 김씨는 자신이 살던 건물이 근저당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보증금반환 후순위 임차인인데다, 소액임차보증금 기준을 넘겨 우선 변제 대상도 제외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씨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낯선 부동산 용어까지 공부해가며 밤낮으로 인터넷 검색에 몰두했다. 본인이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도 대구 전세사기 대책위원회(대책위)에 들어가 다른 전세사기 피해자를 돕기까지 했다. 김씨와 함께 일했던 정태운 대책위 위원장은 시사저널과 인터뷰에서 "살아생전 내게 큰 힘이 돼 준 여장부"라고 그를 기억했다. 정 위원장은 "김씨는 먼저 전세사기를 이겨 내가며 알게 된 정보를 새로이 들어오는 피해자들에게 잘 설명했고 위로했다"며 "누구보다 씩씩하고 똑똑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4월12일, 김씨는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로부터 경매개시결정 등을 충족하지 못해 전세사기 특별법상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 등'으로 인정받았다. 김씨는 이의신청을 하기 위해 임차권등기명령 등을 신청해야 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임차권 등기 신청을 하기 위해 상담차 만난 법무사는 김씨에게 "40만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월수입이 없었던 그에게 40만원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김씨는 정 위원장에게 "나는 그냥 내 돈을 주고 전셋집을 계약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까지 시달려야 하느냐"고 고민을 털어놨다고 한다. 정 위원장은 "(전세사기로) 큰돈을 잃은 사람이 또 돈을 쓴다는 건 두려움 그 자체"라고 호소했다.

김씨는 결국 인터넷을 뒤져 가며 직접 임차권등기명령 등을 신청했다. 정 위원장은 김씨가 피해자 입증을 위해 홀로 싸움을 하는 상황을 버거워했다고 한다. 그는 "변호사 도움 없이 법리를 해석하다 보니 착오가 생겨 당시 피해자로 분류되지 못했다"며 "이의신청을 하는 과정에서도 굉장한 스트레스가 쌓인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결국 김씨는 5월1일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로부터 뒤늦게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통지를 받기 직전인 이날 새벽, 김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 위원장은 김씨를 비롯한 대구지역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관할 지자체로부터 제대로 된 법률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자체의 전세사기 피해지원 업무에 대해 "전세사기 특별법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고 있는지 설명하고, 피해자로 인정받기 위한 서류를 취합해 국토교통부(국토부)에 넘겨주는 중간 역할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대구시 관계자는 "피해자가 시청에 방문하면 무료 법률 상담을 안내하고, 피해자가 소송할 경우 지원도 해왔다"고 반박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김효진(가명·38)씨가 생전에 남긴 유서 일부 ⓒ대구 전세사기 대책위원회 제공

전세사기 피해로 전국 8명 숨져

벌써 8명이 전세사기 피해를 호소하며 세상을 등졌다. 지난해 인천에서만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20~30대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이른바 '빌라왕' 사건의 30대 피해자가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숨졌다. 대책위는 "언론에 보도된 것만 8명일 뿐, 유족이 공개하지 않는 사례까지 합하면 전세사기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수십 명에 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세사기 피해를 본 세입자들은 경제적 부담으로 혼자서 민·형사적 절차를 밟는 경우가 많다. 정 위원장은 "'전세사기'라고 포털 사이트에 검색했을 때 피해자 신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온갖 로펌 전화번호부터 뜬다"며 "막상 로펌에 찾아가도 변호사가 아니라, 30분에 5만원을 주고 대부분 사무장과 상담한다"고 전했다. 그는 민사소송 승소 시 일정 금액을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로펌을 꺼리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혼자서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다 보니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하다고 한다.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장은 "집이 흔들리면 모든 생각이 그쪽으로 집중돼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다"며 "인터넷을 찾아봐도 사례마다 다르고, 뾰족한 답을 주는 곳이 한 군데도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대책위도 전문화된 조직이 아니라 정확한 진단을 내려줄 수 없어 답답하다"고 덧붙였다.

국토부에 따르면,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가 피해자 등으로 인정한 사례는 1만5433건이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올해 1분기까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신고된 전세 보증사고 건수는 2만5000여 건으로, 실제 보증보험 사고 건수는 더 늘어날 수 있다.

이렇게 발생한 전세 보증사고 규모도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보증사고는 지난해 연간 4조3000억원 규모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해 1분기 발생한 사고액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무려 80%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올해 1∼3월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보험 사고액은 1조4354억원, 사고 건수는 6593건이다. 월별로 보면 1월은 2927억원, 2월은 6489억원, 3월 4938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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