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맥클로스키 전 美 하원의원 96세로 별세

김태훈 2024. 5. 9.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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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6·25전쟁 참전용사이자 전쟁 영웅으로 약 16년간 연방의회 하원의원(8선)을 지낸 대표적 지한파(知韓派) 정치인 피트 맥클로스키 전 의원이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계를 떠난 뒤 고인은 오랫동안 한국전쟁기념사업회(KWMF) 회장을 맡아 미국인들 사이에 '잊힌 전쟁'(Forgotten War)으로 통하던 6·25를 널리 알리고 미국 및 한국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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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소대장으로 중공군과 전투… 훈장 받아
생애 말년 "6·25 때 미국이 실책" 반성하기도

미국의 6·25전쟁 참전용사이자 전쟁 영웅으로 약 16년간 연방의회 하원의원(8선)을 지낸 대표적 지한파(知韓派) 정치인 피트 맥클로스키 전 의원이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정계를 떠난 뒤 북한을 방문했으며, 생애 말년에는 한국인들을 향해 ‘6·25 당시 미국의 실책으로 한국의 분단을 막지 못했다’는 취지의 사과를 하기도 했다.

8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 등 미국 매체들에 따르면 맥클로스키 전 의원은 이날 캘리포니아주(州)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유족은 고인의 사인이 울혈성 심부전이라고 전했다.
 피트 맥클로스키(1927∼2024) 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8선). 6·25전쟁 당시 미 해병대 소속으로 한국에서 싸워 은성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이다. 생애 말년에 ‘6·25 때 미국이 저지른 실책을 반성한다’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AP연합뉴스
고인은 대공황 직전인 1927년 9월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 야구선수로 명성을 떨친 그는 1945년 졸업 후 해군에 입대해 1947년까지 복무했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로 미국이 아직 징병제를 유지하던 때였다. 제대 후 명문 스탠퍼드대에 입학한 고인은 대학 졸업과 동시에 다시 군복을 입었다. 한국에서 6·25전쟁이 터지며 미국이 참전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해군이 아닌 해병대 소위로 임관해 한국 전선에 투입됐다.

일선 해병 소대장이던 1951년 고인은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다쳤으면서도 치료 및 후송을 거부하고 끝까지 병사들을 지휘해 큰 공을 세웠다. 약 2년간 한국에서 복무하며 은성훈장(Silver Star)을 비롯한 여러 훈장을 받았다. 1952년 현역을 떠난 뒤에도 1974년까지 해병대 예비군으로 남았는데 퇴역 당시 계급은 대령에 이르렀다.

미국으로 돌아간 고인은 스탠퍼드대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 자격증을 땄다. 로스쿨 졸업 후 캘리포니아주 검찰청 검사가 된 것을 시작으로 공직에 입문했으며 이후 변호사 생활을 거쳐 본격적으로 정계에 뛰어들었다. 1967년 공화당 소속으로 초선 연방 하원의원이 된 뒤 내리 8선을 기록해 하원의 거물로 부상했다. 공화당원이면서도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비판하고 젊은이들의 반전운동을 지지했다.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진 뒤에는 소속 정당을 떠나 닉슨 대통령을 강력히 성토하며 “탄핵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듬해인 1974년 하원의 탄핵소추 시도에 직면한 닉슨은 결국 스스로 물러나는 길을 택한다.

정계를 떠난 뒤 고인은 오랫동안 한국전쟁기념사업회(KWMF) 회장을 맡아 미국인들 사이에 ‘잊힌 전쟁’(Forgotten War)으로 통하던 6·25를 널리 알리고 미국 및 한국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운동에 앞장섰다. 한때 적으로 싸웠던 북한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2014년에는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와 함께 방북해 6·25전쟁 때 서로 총부리를 겨눴던 북한의 퇴역 군인과 만나기도 했다. 훗날 고인은 언론 인터뷰에서 방북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북한의 퇴역 군인에게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기억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서로 얼싸안았다”고 소개했다.

고인은 생애 말년에는 6·25 당시 미군이 저지른 실수를 거론하며 ‘한국인들에게 사과한다’는 취지로 언급해 주목을 받았다. 2022년 6월 6·25전쟁 발발 72주년을 맞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한국인 등을 상대로 행한 연설에서 고인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오만함과 부족한 정보력이 중공의 참전을 초래했다”며 “이로 인해 한국이 통일의 기회를 놓친 것이 가장 뼈아픈 실책”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남침 개시 직전 한국의 절박한 무기 지원 요구를 미국이 거부한 것도 잘못된 일이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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