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김대중] “인동초의 삶” - 김택근 ‘김대중 자서전’ 집필자

백미선 2024. 5. 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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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광주총국은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연중기획 DJ탄생 100년「다시 만난 김대중」을 월 1회 제작,
'뉴스7광주전남'과 '광주전남9시뉴스'에 선보입니다.
디지털 기사는 기획물 제작을 위해 이뤄진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연관 기사] [다시 만난 김대중] "인동초의 삶" - 김택근 「김대중 자서전」집필자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24725

KBS광주 연중기획 DJ탄생 100년 다시 만난 김대중


'나는 전라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1924년 1월 6일 태어났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듬해인 2010년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의 첫 문장입니다. 1,400페이지 분량인 자서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출생과 어린 시절, 청년 사업가의 정치 입문, 사형수가 된 야당 정치인, 대선 출마와 낙선, 15대 대통령 취임과 퇴임까지 김대중의 온 생애가 기록돼 있습니다. 자서전을 집필한 이는 김택근 작가,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입니다. 자서전은 41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초고를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직접 검토·수정하는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김대중 감옥'에 갇혀 살았다고 말하는 집필자는 자서전을 마치고 다시 2년에 걸쳐 김대중 평전「새.벽.」을 썼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난 2004년의 봄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 2004년 봄, 김대중을 만나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하신 후에 그 비서관 2명이 저를 찾아왔어요. '김대중 대통령께서 저한테 자서전을 써달라고 한다'고 그래요. 깜짝 놀랐어요. 나는 김대중 대통령하고 사적 인연이 없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자서전을 써달라고 한다니까 너무너무 놀랐죠. 그래서 내가 못 쓴다고 그랬지. 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긴 글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그 파란만장한 삶을 내가 정리할 자신이 없었고…. 그랬더니 김대중 대통령을 한번 만나는 보시라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존경하고 또 나름대로 젊은 날에 그분의 이름을 연호했던 사람으로서 만나보고는 싶었죠.

그때가 이제 제가 경향신문 부국장으로 있을 때니까 2004년 봄, 4월이야. 근데 그때가 총선에서 동교동계의 모든 가신과 측근들이 다 선거에서 져가지고 동교동 골목에 시체가 아주 즐비할 때 그때 아주 김대중 대통령이 하여튼 일생에서 가장 쓸쓸할 때 그때 가서 독대를 한 거예요. 처음에 악수를 해보니까 손에 힘이 하나 없이 그렇게 쇠약하더라고요. 떠오르는 권력 노무현 정권, 신권력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계승한다 하면서도 대북송금 특검을 해가지고 그 퇴임한 대통령이 막 가슴을 쥐어뜯을 때 일생에서 보면 가장 그 양반이 쓸쓸할 때 만난 거죠.
인터뷰 중인 김택근 작가 ( 전 경향신문 논설위원). 2024년 3월.


■ 마주한 거인의 삶…자서전 집필의 시작

그때 만났을 때 한류 얘기가 나왔는데 한류는 김대중 대통령이 일으킨 거 아닙니까? 사실.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스타들이 일본에 상륙해서 말하자면 한류를 일으킨 건데…한류가 그때 없어지니 마니 이럴 때예요.
"대통령께서 일으킨 한류가 요새 뭐 쇠퇴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랬더니 절대 아니라고 "앞으로 한류는 그렇게 간단히 사라지는 그런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 재창조력은 대단히 위대해서 유교를 들여와서도 우리나라 퇴계학이 지금 세계 24개국의 퇴계학이라 할 정도로 우리 나름대로 발전시켰고, 또 불교가 들어와도 해동불교로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의 문화 재창조력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
그런 얘기를 쭉 들어가면서. 아, 이 양반 대단한 분이구나. 거인이다.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 내가 재주가 없지만, 저분의 삶을 한번 정리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 운명이 담긴 아호「후광(後廣)」

김대중 대통령이 호로 후광(後廣)을 삼았는데 생가가 후광리에요. 그건 뒤가 넓다는 의미입니다. 뒤가 넓다. 후광(後廣). 간척지예요, 거기가. 간척지로 만들어서 뒤가 넓은 그런 땅이라고 해서 그걸 아호로 삼았는데 그 생가를 갔었어요. 가보면 김대중 대통령의 생가는 대통령 나올 자리는 아니다 제가 보기에는. 우리가 보통 배산임수라는 전통적인 그런 명당 자리가 아니에요. 간척지 아닙니까? 어머니가 거기서 국밥집을 하셨고. 제가 하의도를 다녀왔다니까 저한테 "어떻습디까" 하고 물어봐요. 제가 그런 얘기 했어요. "명당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대통령께서는 간척지, 생가가 간척지인 것처럼 바다에 길을 내듯이 대통령의 삶이 그렇게 험난했던 것 같습니다."라고. 김대중 대통령이 조용히 웃더라고 내 말에 공감하신 거죠. 보통 자기 고향을 호로 삼는 경우가 많아요. 거산(巨山)도 거제도하고 부산 합쳐서 YS도 그렇게 정했잖아요. 김 대통령도 그냥 고향을 아호로 그렇게 삼았는데… 본인의 운명이 그렇게 되는 것을 아마 감지를 못했겠죠.


■ 겁쟁이 ·울보… 어린 시절의 김대중

어렸을 때는 보통 화장실이 옛날에 보면 떨어져 있잖아요. 마당 가로질러서 저쪽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그 화장실을 무서워서 못 갈 정도였어요. 퇴임 이후에는 산전수전 다 겪었음에도 퇴임 이후에… 방에서 뭐가 튀어나올 것 같다고 그럴 정도로. 어떻게 보면 겁이 많다고 그럴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두렵다. 나도 너무 두렵다. 몸이 떨릴 정도로 두렵지만 내가 나서야 할 것, 자리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야 할 때이기 때문에 내가 나서는 것이다. 대통령은 그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진정한 용기는 두려움을 없애고 이런 것이 아니라… 두렵지만, 두렵지만 의로운 데서 나서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그렇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굉장히 맑고 순수하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그런 민주화 투쟁에 과감하게 맨 앞에서 나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전도유망한 사업가에서 정치의 길로

김대중 대통령은 6.25 전쟁과 그 전쟁 와중에서 일어난 이른바 부산 정치 파동. 이 두 가지를 보면서 정치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6.25 전쟁을 통해서… 전장에서는 그 생때같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가는데 이승만 정권은 독재를 연장시키기 위해서 4사 5입 개헌 파동을 일으키잖아요.


나쁜 정치라도 그걸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를 통해서만 바꿀 수 있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정치의 무서움을 깨닫고 정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생각해서 정치인이 되리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일생 동안 전쟁을 없애기 위해서 남북화해· 평화통일을 이뤄야만이 가능한 것이고. 또 백성이 주인인 세상을 열려면 이 나라의 민주화가 되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남북 통일과 민주화 투쟁에 온생을 바친 것이라고 그걸 스스로 밝혔어요.

■ 독재자의 탄압…본질은 두려움
독재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대중 정치인을 가장 두려워해요. 그런데 김대중은 자기를 능가할 수 있는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잠재력과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이미 이걸 간파한 거죠. 그래서 끊임없이 김대중을 제거하려고 했던 거죠. 김형욱 정보부장 박정희의 심복, 그 사람이 직접 얘기를 했어요. 박정희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김대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서…두 번을 살해하려고 그랬고, 또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뜨리려고 이른바 목포의 전쟁이라는 걸 했잖아요.목포에 선물을 비 오듯이 다 살포하면서 김대중을 낙선시키려고 했지만 살아남았잖아요.

저는 그때 그런 걸 느꼈어요. 김대중에게 그런 탄압을 가했다는 것은 박정희도 굉장한 정치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구나. 미래의 어떤 거목을 알아본 거죠. 박정희의 김대중에 대한 탄압과 그런 박해는 김대중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왔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자비했죠.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끝없이 용서와 화해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김대중에 대해 '설마 그럴까?' 정적들이 의심하면서도 끝없이 정치 보복을 않겠다는 그런 그런 화해의 제스처를 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구명하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해요.

■ 늘 곁에 있었던 '죽음' …어떻게 견뎠나?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나는 그것이 가장 두렵다."

'국민· 역사 ·하느님' 이 세 가지가 김대중 대통령을 절망에서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은 마지막까지… 김대중 대통령이 늘 그랬어요. 마지막까지 자기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지탱할 수 있는 건 국민밖에 없다. 그리고 마지막에 '국민은 현명하다'라는 얘기를 했고 '역사의 심판은 공정할 것이다. 그 역사의 심판을 나는 두려워한다. 거기에서 나는 살아남고 싶다.' 이런 얘기를 하고. 또 '하느님은 마지막에 나를 품어줄 그런 절대 공간이며 나를 알아줄 마지막 언덕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 세 가지 '역사 ·국민 · 하느님'이 위기 때마다 김대중을 지탱해준 힘의 원천이죠.


정말 많은 사람이 김대중 대통령을 폄하하고 마지막에는 무덤까지 불탔잖아요, 돌아가신 이후에. 퇴직해서도 혼신을 다해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애썼고, 병을 얻어 동교동에 와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데 극우 보수단체들이 와서 김대중 빨갱이 막 그렇게 거짓말쟁이 용공 분자 이렇게 소리 지를 때… 그때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 남아 있는 이 사람들하고 나는 화해가 안 되는가 보다. 나는 역사 속에서, 후세에. 그러니까 우리나라를 경영할 다음 세대가 나를 역사 속에서 끌어냈을 때 그때 떳떳해지고 싶다." 라는 얘기를 했어요. 오죽 답답하면 그렇겠습니까? 마지막에는 또 그랬죠. "이제 나를 그렇게 음해했던 사람들도 편안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분들은 그 사람들은 나의 역사에서 나를 발견하고 후회할 것이다." 이런 얘기도 했어요. 오죽 사무쳤으면 그런 얘기를 했겠습니까?

■ 강을 이룬 눈물… 슬픔이 서린 삶

지난날에 여러 가지 자기 삶의 궤적을 보면 한 번도 활짝 웃어본 적이 없잖아요. 삶 자체가. 자신의 이름을 연호해가면서 지지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불이익을 당했습니까? 수도 없이 당했고. 그 사람들한테 자기가 제대로 해준 것이 없어요. 그런 거에 대한 미안함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얼마나 상 중의 상인데 그 상을 받으면서 표정을 보면 아주 미안한 미소…. 그 영광을 민주화 투쟁을 같이 했던 동지들한테 바친다고 그랬잖아요. 그런 연장선에 있는 거죠.


저는 김대중 대통령도 위대하지만, 김대중을 김대중 대통령으로 만든 국민들도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이 죽을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박해받고 그럴 때 김대중을 살려달라고 교회에서, 사찰에서, 어느 골방에서, 또 버스 칸에서 열차에서 김대중을 살려달라고 흘린 눈물. 그 눈물들이 강을 이루고, 그 눈물의 강을 타고 올라가서 김대중 대통령이 된 거예요. 저는 그런 국민들도 위대하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런 국민의 힘으로 된 자신이 환하게 어떻게 웃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의 말년의 모습은 아주 현자의 모습이지만 그 모습에 슬픔이 서려 있었어요. 저는 그걸 봤습니다.

■ "큰 산인 줄만 알았는데 산맥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막연히 큰 산으로만 알고 갔는데 가보니까 이분이 한 일이 너무 많고 다방면에 너무 박식한 거예요. 그분의 지식과 논리가 다 검증된 거예요, 나름대로. 그러니까 제가 너무 초라해지고, 주눅도 들고 그래서 작업하다 보면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김대중은 산이 아니라 산맥이다. 골짜기 골짜기마다 많은 것이 있고 그 정상마다 빛나는 표식이 있다…. 그런 얘기 있잖아요. 고 노무현 대통령 자서전 비슷한 책이 나왔죠. 거기에 보면 참모들을 데리고 산봉우리에 올라갑니다. 우리가 천연 미답 봉우리에 올라갈 것이다 하고 갔는데 이미 김대중 대통령이 참모들하고 같이 와서 도시락 먹고 담배 한 대씩 피우고 내려간 그런 자리였다는 거예요. 정책의 천재라고 그랬거든. 김대중 대통령의 혜안이 없었다면 할 수가 없었던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IT 강국이 된 것이… 김대중 대통령이 감옥에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을 읽고 "내가 국가를 경영하면 IT 강국을 만들겠다." 라고 결심을 하고, 실제로 나와서 그 어려운 외환위기 때 실행을 합니다. 빌 게이츠, 손정의, 엘빈 토플러 이 세 사람을 IT 스승으로 모셔요. IT 인프라를 깔고 손정의의 조언을 받들어서 모든 학교에 컴퓨터를 다 보급하고 이래서 IT 강국을 만든 거예요. 그런 분을 제가 이렇게 가서 글로 쓰려고 보니까 너무나 힘들고 그래서… 제가 표현을 그분은 산이 아니라 산맥이었다 이런 표현을 쓴 거죠.

■ 자서전 집필 뒤 탄생한 김대중 평전「새벽」

김대중 대통령은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일어난… 우리 민족이 아침을 맞게 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난 사람이다. 그런 의미로 새벽을 썼죠. 선구자 그런 이미지가 들어가 있죠. 거기에.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또 실제로 대통령이 되어서 우리나라를 전혀 다른 나라로 옮겨놨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의 아침, 새 아침을 가져온 …그런 새벽을 불러온 그런 인물이다라는 의미로 새벽으로 지었습니다.

…이분의 일기가, 3년 치 일기를 말년에 쓰셨거든요. 그래서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일기를 다 봤는데 그 중에 2006년 9월 일기였을 거예요.
'처서' 날인데 그 날도 온도가 한 30도 올라갔어요. (일기에) '처서인데 여전히 더위가 물러나지 않는다. 이 더위에 지하 단칸 셋방에 사는 , 겹쳐서 자는 일가족은 얼마나 서러울 것이냐' 이런 내용이 있어요. 그 일기를 보면서 따뜻함이 제 가슴으로 솨악 들어오는 거예요. 애민애족이 이런 것이었구나. 그분은 가식이 없는 삶을 살았어요.
…그분은 "정치인은 심산유곡에 피어나는 백합화가 아니다. 정치인은 흙탕물에서 피어난 연꽃이 돼야 한다. "고 그랬어요. 서민들과 부대끼면서 살아야 된다는 이야기죠 그게. 국민과 함께 부대끼면서 인간의 얼굴로 다가왔던 우리 따뜻한 이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연관 기사] [다시 만난 김대중]"통합과 화해의 정치" - 임채정 전 국회의장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948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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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선 기자 (b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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