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굶던 20살 청년, 대한민국 상위 1% 자산가 된 비결 담은 ‘이 책’ [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손효림 기자 2024. 5. 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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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의 베스트셀러 레시피]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와 지하 단칸방에 살던 소년은 집에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아침마다 냄비에 끓인 물에 찬물을 섞어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다. 스무 살 때는 밥값이 없어 점심과 저녁을 굶었다. 의사가 된 그는 서울 강남에 병원을 여느라 35세에 10억 원의 빚을 졌다. 40대인 지금, 그는 강남 건물주가 됐다.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토네이도)를 쓴 이하영 원장(48)의 이야기다. 그가 가난을 딛고 대한민국 상위 1% 자산가가 된 비결을 담은 이 책은 올해 2월 말 출간된 후 두 달 만에 3만 권 넘게 판매됐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책 판매 속도는 지금도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 책 표지. 토네이도 제공

이 원장을 7일 전화로 인터뷰하고, 책 편집자인 박수진 토네이도미디어그룹 기획편집부 차장(41)을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원장은 “이렇게 관심이 높을 줄 몰랐다. 얼떨떨하다”고 했다.

책이 나오게 된 건 이 원장이 지난해 1월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게 계기가 됐다. 그가 사는 서울 성동구의 고급 아파트를 촬영하다 살아온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조회수가 100만 회를 훌쩍 넘으며 화제가 된 것. 그가 추천한 책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웨인 다이어 지음·정지현 옮김)는 순식간에 판매량이 급증해 한 온라인 서점에서 자기계발 분야 1위에 올랐다. 2019년 토네이도에서 낸 이 책의 순위가 역주행하자 박 차장은 이 원장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출간을 제안했다. 소위 ‘대박’이 난 유튜브 영상과 그 주인공들을 숱하게 봐 온 박 차장이 이 원장에게 책을 내자고 한 이유는 뭘까.

“원장님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어요. 스무 살 때 고시원에서 살며 새벽까지 공부한 이야기를 하며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고 한 걸 보고 도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어요. 보통 스무 살 때는 후회와 ‘이불킥’으로 가득한 순간이 대부분이지 않나요?”

이 원장은 망설였다.

“물질적인 성공과 소유를 위한 방향으로만 글을 써야 하는 건가 싶어 고민이 됐어요. 지금의 저를 만든 건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긍정, 마음공부였기에 이를 알리고 싶었거든요.”
빨리 책을 내고 싶어 마음이 급했던 박 차장은 설득에 나섰다.

“현실은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강조하시는 만큼 이를 실생활에 접목할 수 있도록 쉽게 쓰시면 된다고 했어요. 원장님이 추천한 책이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정도면 직접 쓴 책은 더 많은 분들이 좋아하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이 원장은 결국 수락했다. 책에는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해 준 사고방식, 마음공부 방법과 함께 그의 인생도 자세하게 담았다. 박 차장은 “삶의 궤적을 풀면서 원장님이 지닌 매력을 부각하면 책에 담긴 메시지가 더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를 쓴 이하영 원장. 이하영 원장 제공

이 원장은 6살 때 부모님이 이혼한 후 어머니와 살았다. 배를 탔던 아버지는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폭언을 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낸 지하 단칸방은 곰팡이 슨 벽지가 군데군데 벗겨져 시멘트가 드러났다. 바퀴벌레, 날파리와 ‘공생’했고 천장에서는 쥐 소리가 났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세수하고 머리를 감기 위해 아침마다 냄비에 물을 끓여야 했다. 물 온도를 잘못 맞춰 머리에 종종 화상을 입었다. 방이 너무 작아 그가 자라면서 아침에 일어나다 식탁, 장롱에 머리나 다리를 부딪치기 일쑤였다. “이런 데서 못 살겠다”고 엉엉 울던 그에게 어머니는 눈물을 참으며 말했다. “네가 너무 큰 사람이 되려고 그래”라고. 어머니의 말은 그에게 강렬하게 각인됐고, 그는 이를 굳게 믿었다.

대학은 포항공대(포스텍)에 진학했다. 학비가 거의 들지 않고 기숙사비도 저렴했기 때문이다. 우연히 들어간 연극 동아리에서 의사 역을 맡은 그는 그 느낌이 좋아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학기가 끝난 후 재수를 시작했다. 어머니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과외를 하며 고시원에서 살았다. 식사는 고시원에서 먹는 아침밥이 유일했다. 저녁 때 과외를 하러 간 집에서 간식으로 내 온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랬다. 그 집 식탁에 차려진 불고기와 나물 반찬이 풍기는 냄새를 뒤로 하고 나와야 했다.

독서실에서 공부할 때 그는 의사 수술복을 입었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빛바랜 청록색 의사 수술복 두 벌을 사서 ‘의사 이하영’이라는 글씨를 주머니에 새겨 넣었다. 사람들은 그를 전문의 시험 준비를 하는 이로 여겼다. 실제 전문의 시험 준비를 해도 수술복을 입고 공부하지는 않을 텐데,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이 원장은 “어차피 입을 옷이 없어 뭐든 사야 했다. 재수생을 상징하는 추리닝은 싫었다. 10년 뒤 펼쳐질 의사의 삶을 상상했고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공부하다 시계를 보면 새벽 1시가 넘었고 독서실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부산대 의대에 합격했다. 의대를 졸업한 그는 홀로 서울로 올라와 삼성서울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했다. 이 병원의 연봉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중보건의사를 한 뒤 1년 간 페이닥터로 지냈다. 35세에 10억 원의 빚을 내 강남에 개원했고, 지금까지 얼굴 살 관리를 하고 있다. 그는 “치열하게 살았던 스무 살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 스무 살의 내가 정말 고맙다. 그 때의 나를 가장 존중한다”고 했다. 다만, 이 원장은 처절했던 가난이 오늘날의 성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일종의 ‘장치’처럼 보이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실제 겪은 가난은 정말 잔인하다”고 했다.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의 편집자인 박수진 토네이도미디어그룹 기획편집부 차장.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숨 가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뜨겁게 그리고 세차게 달려온 그의 삶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나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고 마음공부를 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살기 위해 독서, 운동, 명상을 통해 ‘기본기’를 다졌다. 그는 “책을 읽을 때 내용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저자와 대화하듯 하나하나 짚어보고 의문을 가진다. 책 여백에 내 생각을 많이 쓴다. 그래야 나만의 생각과 시각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이어 “제 책을 읽는 독자들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운동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걸 잊게 된다. 이를 통해 힘을 낼 수 있다. 명상은 온갖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에게서 벗어나 또 다른 나를 만나게 한다. 나의 수호천사인 또 다른 내가 만드는 세상에 나를 맡길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의 삶을 바꾸고 싶다면 시간, 공간, 인간을 리셋하라고 당부한다. 그는 “발전할 수 있는 공간에 가서 이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긍정적인 기운을 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이 원장은 집필 초반에는 이런 내용을 풀어내기가 어려웠다고 토로했다.

“사람들이 관심 많은 물질적 성공, 좋은 인간관계 등을 제가 마음공부를 하며 얻은 깨달음과 어떻게 연결지어 저만의 언어로 쓸 지 고민했어요. 마음으로 현실을 만드는 방법을 담아내려 애썼습니다.”

이 원장이 지금의 자리에 선 건 부단한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초긍정 DNA’와 뛰어난 두뇌도 한 몫 한 게 아닐까. 이에 대해 그는 초긍정 DNA는 수긍하면서도 “공부 머리는 여러 재능 중 하나”라고 했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잖아요. 저는 같은 책을 100번 볼 수 있는 참을성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 학원이나 과외는 꿈도 꿀 수 없었어요. 그래서 ‘수학의 정석’ 해답지를 말 그대로 100번 정도 봤어요. 그렇게 보니까 외워지게 됐고, 수학을 잘하게 된 거예요.”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를 쓴 이하영 원장. 이하영 원장 제공

책에는 이 원장이 자산을 형성한 구체적인 방법은 나오지 않는다. 이 원장은 “재테크 방법은 부동산, 주식 등 분야별로 책이 많은데다 ‘일타 강사’도 엄청나게 많다”며 “팁보다는 자기 스스로를 들여다보면서 삶의 레벨을 끌어올리는 원리를 설명하는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재테크 과정이 안 나오니, 그가 개원한 후에는 무난하게 빚을 갚고 수월하게 자산을 늘려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원장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저도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커피숍, 메디컬 스파, 사진 스튜디오를 열었다가 망했어요. 해당 업에 대해 잘 모르고 막연하게 잘 되는 업종이라 여기고 뛰어든 결과죠. 앎이 없는 상태에서 움직이니 그렇게 된 거예요.”

실제 생활에서 당면하는 고민에 대해서는 직설적으로 조언한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중 뭘 선택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이 원장은 ‘돈 되는 것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돈 되는 것이 내가 잘하는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 원장은 “추상적인 내용보다는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인 사례를 넣어달라는 편집자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며 웃었다.

책을 마케팅하는 데 주요한 요소 중 하나로 꼽히는 추천사가 이 책에는 없다. 박 차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목차를 원장님과 함께 구성한 뒤 원고를 받아 읽다보니 밑줄 칠 부분이 정말 많았어요. 저 스스로도 성장하는 게 느껴졌죠. 원장님이 지닌 색깔과 전하는 메시지를 알게 되면 경청하게 될 거라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추천사가 필요없다고 생각했죠.”

이 원장은 종교는 없지만 각종 종교 서적을 많이 보고, 소설 시 에세이를 비롯해 철학 등 인문학 책을 자주 본다. 일주일에 두 번 서점에 가서 책을 직접 살펴보고 고른다. 그는 이 과정을 살아가는 기본기를 다지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원장님이 제안한 삶의 방식을 통해 마음의 온도가 올라가고, 조금 더 나아지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박 차장)

“스스로에 대한 앎과 미래에 대한 확신, 지혜를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독자들에게 가 닿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이 원장)

■‘나는 나의 스무 살을 가장 존중한다’(토네이도·2024년)은….
따뜻한 물도 나오지 않는 지하 단칸방에서 살았던 소년이 대한민국 상위 1% 자산가가 된 비결을 담았다. 저자인 이하영 원장(48)은 포항공대(포스텍)에 입학해 우연히 들어간 연극 동아리에서 의사 역을 맡은 후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재수를 결심했다. 1학기가 끝난 후 과외로 생활비를 벌며 고시원에서 살았다. 고시원에서 먹는 아침밥 한 끼에, 과외하러 간 집에서 간식으로 내 온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며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부산대 의대에 합격했다. 치열하게 살았던 스무 살 시절의 자신에게 늘 고마워한다. 혼자 서울로 올라와 삼성서울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를 한 후 페이닥터로 1년 일했다. 35세에 10억 원의 빚을 내 강남에 병원을 개원했고, 지금까지 얼굴 살 관리를 하고 있다.

이 원장은 이런 삶이 가능했던 건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고 마음공부를 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독서, 운동, 명상을 통해 삶의 ‘기본기’를 다졌다고 한다. 지금과 다르게 살길 원한다면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가 이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긍정적인 기운을 주는 사람을 만나라고 당부한다. 친구가 성장에 허들이 될 때는 떨쳐내라고 말한다. 친구가 허들이 되는 건 자신이 이미 커 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덧붙인다.

이 원장이 미래 자신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확신을 가진 데는 어머니의 영향도 컸다. 방이 좁아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장롱과 식탁에 머리와 다리를 부딪쳐 울던 그에게 “큰 사람이 되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한 어머니의 말을 굳게 믿었다. 부정적 생각, 불안, 두려움에 잠식될 때는 스스로를 관객의 눈으로 바라보고 생각을 흘려보내라고 당부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힘들고 속상해 하던 그에게 “그렇구나, 그럴 수 있다, 그래라 그래”라며 한 말은 이를 가능하게 한 지혜라고 말한다.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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