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고 더 비싸진 '임신 중지', 왜 방치하고 있나 [스프]

조윤하 기자 2024. 5. 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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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피커] 낙태죄 헌법 불합치 이후 5년 지났는데 아직도?

2020년에 개원한 21대 국회가 약 3주 뒤면 막을 내립니다. 4년 동안 발의된 법안은 모두 2만 5,832건으로, 이 중 9,454건만 처리됐습니다(의원 발의, 정부 제출안 포함).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 1만 6,378건은 회기 내에 처리되지 못하면 모두 폐기됩니다. 폐기 위기에 처한 법안 1만 6,378건에는 '낙태죄 폐지' 후속 입법안인 형법 개정안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낙태죄 폐지됐지만 진전 없는 '임신 중지권'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처벌 조항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보다 우선한다고 판단한 겁니다. 임신 중지는 더 이상 처벌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고, 음지에서 행해지던 임신 중지 시술이 양지로 올라올 계기가 마련됐습니다. 헌재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며 '낙태죄 조항을 개정하라'고 국회에 권고했습니다. 헌재가 제시한 개정 시한은 2020년 12월 31일까지였습니다.


후속 입법은 진전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개정 시한은 다가왔고, 낙태죄는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임신 중지에 대한 처벌 역시 폐지됐습니다. 여성 인권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입법 논의가 미비한 탓에 정작 임신 중지를 해야 하는 여성들에겐 변한 게 없었습니다.

현재까지 형법 개정안 6건, 모자보건법 개정안 7건이 발의됐지만 상임위를 전전하며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실은 의원들이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개정 시한을 넘긴 지 3년 4개월이 지났지만, 이번 국회 내에서도 법안 처리 가능성은 낮습니다. 낮은 정도가 아니라 0에 가깝죠. 헌재의 헌법 불합치 결정 이후에도, 여성의 임신 중지권은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임신 중지 정보 부족으로 '을'이 되는 여성들

#1
지난 2021년 가을, 30대 여성 A 씨는 임신 4주 차에 임신 중지 시술을 받았습니다. 실은, 임신 사실을 안 뒤 약을 복용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고 오랫동안 내원하던 산부인과를 찾아 시술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산부인과 원장은 표정이 싹 바뀌며 시술에 대한 설명조차 해주지 않았습니다. 임신 중지를 거부한 것이지요. 순간 '이런 병원을 내원했다'는 게 후회스러웠다고 합니다. A 씨는 임신한 몸을 이끌고 다른 병원을 찾아 헤맸고, 지인을 통해 믿을 만한 산부인과를 찾았습니다. 거리가 멀었지만, 상담부터 시술까지 그 병원에서 진행했습니다. 모두 100만 원이 들었습니다. A 씨는 이 돈을 모두 현금으로 내야 했습니다.
 
#2
같은 해 여름, 30대 여성 B 씨는 임신 6주 차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된 판매자에게 약물을 구매해 복용했습니다. 약 구매 가격은 80만 원. 약물 복용 후 여러 신체적 증상 때문에 힘들었지만 도움을 구할 곳은 없었습니다. 약 복용 전, 임신 중지 방법과 비용 등을 병원에 문의하고 싶었지만 병원 측에서 돌아온 답변은 '반드시 보호자를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곤란했던 B 씨는 고민 끝에 자신의 지인을 섭외해서 상황을 모면해야 했습니다.

최근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가 발간한 <2021년 이후 임신 중지 경험 조사 결과 보고서>에 기재된 실제 사례입니다. 임신 중지를 경험한 여성 6명의 조사를 토대로 작성된 보고서에는 현재 임신 중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어떤 논의가 필요한지 담겨 있습니다.


A, B 씨를 포함한 임신 중지 경험자들은 가장 큰 문제로 '정보 부족'과 '값비싼 비용'을 꼽았습니다. 대부분 임신 초기에 임신 중지를 하고자 했지만 인터넷·휴대전화 앱 외에는 정보를 얻을 창구가 없었고, 이 역시 신뢰도가 높지 않았습니다. 특히, 주변 어떤 병원에서 임신 중지가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비용은 얼마이고 얼마만큼 시간이 소요되는지 등 구체적인 정보가 제공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보를 얻을 곳이 많지 않다 보니, 잘못된 정보가 마치 사실처럼 여겨졌다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임신 중지 약물도 보통 얼마에 판매되는지, 후유증은 없는지, 정품이 맞는지 등 기본적인 정보가 제공되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용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현재 임신 중지 시술 가격은 병원마다 천차만별입니다. 한 응답자는 병원마다 시술 가격이 10~30만 원까지 차이났다고 답했습니다. 병원에서 부르는 게 값인 셈입니다. 임신 주차마다 진행되는 임신 중지 시술 과정이 다른데도 어떤 병원은 주차에 상관없이 같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임신 중지 여성 대부분은 시술 비용을 '현금'으로 냈습니다. 카드 결제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죠.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고,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를 악용해 무조건적으로 현금을 요구하거나 가격을 의도적으로 높게 책정한 병원도 있었습니다. '을'인 임신 중지 여성이 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던 거죠.
 

"임신 중지, 의료 서비스로 인정해야"

전문가들은 임신 중지를 의료 체계 범주 안으로 들여와야 한다고 제언합니다. 낙태죄는 엄연히 폐지됐지만 그다지 달라진 게 없는 임신 중지권을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선 이를 의료 서비스로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21대 국회에서 사실상 방치됐던 낙태죄 대체 입법 논의를 22대 국회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야 할지, 김선혜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에게 들어봤습니다.


Q.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은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 : 임신 중지가 더 이상 불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생각보다 영향이 큽니다. 체감 못할 수도 있지만, 임신 중지는 자기결정권을 굉장히 제한하거든요. 낙태죄 효력이 있을 때에는 임신 중지를 하면 '내가 언제든지 처벌당할 수 있고, 고소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이걸 빌미로 남성들이 협박을 할 수도 있었고요. 병원 의료인 역시 자신이 합법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임신 중지술에 대한 위축이 있습니다. 의료인들조차 '우리 병원에서 임신 중지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죠. 하지만 (낙태죄 폐지 이후) 시간이 좀 지나면서 점차 '우리 병원에서는 몇 주까지 무슨 방법으로 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는 병원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이런 얘기들을 공식적으로 들을 수 있고, 파트너에게 협박을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여성은 자기 자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Q. 낙태죄 폐지 이후 국회에서 대체 입법 논의가 상당히 더뎠습니다. 현재는 어떤 상황인가요?

▶ 김선혜(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 불법은 아니게 됐지만 실질적으로 임신 중지에 대한 권리가 보장되고 있진 않습니다. 보통 우리가 아파서 병원을 가면 어떤 처치를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보를 얻잖아요. 단순 의료 정보뿐만 아니라 현재 나의 몸의 상태라든가 건강에 대한 정보도 얻죠. 임신 중지에 대한 정보 역시 인터넷에 몰래 찾아봐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의료기관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됐을 때, 내 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나영 대표 : 현재 임신 중지는 공식적인 의료 영역으로 여전히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각 의료기관에서도 '몇 주 이상이면 안 된다'는 등 모자보건법 한계 안에서 관행들을 계속 유지하고 있죠. 그것과 상관없이 임신 중지 시술을 안전하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요. 의료기관에선 인정되지 않는 불법적인 일을 마치 선심 써서 해주듯 하니 의료비는 높게 책정되고, 병원마다 의료비 차이는 점점 커집니다. 임신 중지 상황에 놓인 여성들은 이런 문제들을 계속 감당을 해왔던 거고요. 그냥 위험하고 비싼 임신 중지가 됐을 뿐이에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조윤하 기자 hah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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