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interview] ‘축구를 사랑하던 소녀’에서 ‘연맹 팀장’이 되기까지, 한국프로축구연맹 양송희 홍보팀장의 축구 인생 (1편)

포포투 2024. 5. 9. 09: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포포투] 'IF'의 사전적인 의미는 '만약에 ~라면'이다. 은 '만약에 내가 축구 기자가 된다면'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누구나 축구 전문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시작됐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고 있는 'No.1' 축구 전문지 '포포투'와 함께 하는 은 K리그부터 PL, 라리가 등 다양한 축구 소식을 함께 한다. 기대해주시라! [편집자주]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한국 축구를 뒤덮었던 2002년, 한 소녀의 꿈이 시작됐다. 그해 중학교 1학년이던 양송희 프로축구연맹 홍보팀장은 한일월드컵을 통해 축구에 빠졌다. 김남일 선수를 응원하던 평범한 소녀는 좋아하는 선수가 뛰던 K리그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졌다.


처음부터 축구 관련 직업을 꿈꾸지는 않았다. 다만 중학교 때 생긴 K리그 사랑이 어른이 된 후는 물론 현재까지도 그대로다. 축구를 보는 것과 함께 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 마음이 여자축구 동아리와 한국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축구 대회 출전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녀는 “흥미로 시작했던 축구 관련 활동으로 진정성을 갖춘 게 진로고민에 도움을 줘 축구계에서 직업을 찾았다”고 말한다.


양송희 팀장은 자신의 학창시절을 평범했다고 기억한다. 남들처럼 공부하고, 친구들과 좋아하는 축구를 함께했었다. 대신 “축구에 대한 열정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천 유나이티드의 직원으로 시작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스토어를 거쳐 이제는 ‘프로축구연맹 최초의 여성 팀장’이 된 양송희 홍보팀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편에서는 목표를 이룬 후에도 계속해서 무대를 바꿔온 양송희 팀장의 도전기가 펼쳐진다.


# ‘첫 직장’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5년


양송희 팀장이 축구에 입문한 2002년엔 남자 축구팬의 비중이 확연히 높았지만, 지금은 젊은 여성 팬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에 따라 축구계 진입을 원하는 취업준비생도 증가하는 추세다. 하지만 목표했던 곳에 취업한다고 해서 모든 고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축구 산업 종사자를 꿈꾸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구계 취업 이후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전해주기 위해 양송희 팀장의 첫 걸음, 인천에서의 5년을 돌아봤다. 그녀는 퇴사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인천 경기를 자주 보러 간다”며 첫 번째 커리어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첫 직장이 인천 유나이티드였는데 입사부터 퇴사까지 어떠한 업무를 하셨나요?


인천에서 5년 1개월 정도 근무했다. 입사 후 경기장관리팀, 홍보팀, 경영기획팀 등 다양한 부서에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인천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나 감동했던 순간은 무엇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인천에 있을때 2015, 2016시즌 동안 같이 일했던 크로아티아 출신 수비수 요니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요니치가 처음 우리 팀에 왔을 때만해도 팀에 따로 통역이 없어서 간단한 인터뷰 통역 등은 내가 도와주곤 했다. 또, 2016시즌에는 같이 K리그 대상 시상식 무대에 오르게 됐는데 상을 받는 요니치보다 내가 더 긴장해서 요니치가 날 진정시키던 기억도 있다.


2016시즌이 끝난 후 요니치가 J리그로 이적하면서 더이상 볼 수 없게 됐지만, 이후로도 누군가 나에게 인천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아했던 선수를 물어보면 항상 요니치를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올해 요니치가 8년만에 인천으로 복귀를 하게 된거다. 기사로 보자마자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요니치도 나를 잊지 않고 인천 직원한테 먼저 내 소식을 물어봤다더라. 그래서 인천 직원이 영상 통화도 시켜줬고, 올 초 미디어 행사에서도 반갑게 재회했다. 앞으로 은퇴할 때까지 K리그에서 오래오래 뛰어줬으면 좋겠다.


-목표했던 곳에서 일했던 만큼 퇴사 결정이 쉽지 않았을 텐데 계기를 알고 싶습니다


회사를 다니려면 계속 다닐 수 있었다. 누구보다 인천을 사랑했고, 또 축구를 좋아하면서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했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개인적으로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더 성장하고 싶었다. 특히 퇴사를 했던 해에는 경영기획팀에서 일했는데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목마름이 생겼다.


(2016년 K리그 시상식에서 인천 요니치, 송시우 선수와 기념 사진을 찍었던 양송희 팀장-본인 직접 제공)


-’첫 직장’ 인천에 대한 뜻이 아직까지 남아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도 인천 홈 경기 직관을 많이 간다. 작년에도 열 경기 가까이 간 것 같고, 올해는 개막하고 두 번 갔다. 경기장에서 열정적으로 응원한다 거나, 진다고 화가 나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 정도 많이 가는 팀이다. 심지어 인천 사람이 아닌 우리 아빠도 여전히 인천 경기를 다 챙겨 보신다.


# 더 큰 경험을 위한 서른의 결단, 영국 도전기


5년간 몸담은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퇴사했다. 그리고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세상이 ‘늦었다’고 볼 수도 있는 시기였지만 큰 변화를 택했다. 자신과 주변 모두 안정된 직장을 떠나는 것을 걱정했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더 큰 무대에서의 새로운 축구계 경험을 위해 영국으로 떠났다. “축구 일을 계속하려면 축구 선진국에서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꿈을 안고 떠난 양송희 팀장의 도전 이야기를 함께했다.


-퇴사 이후 행보로 쉬운 결정이 아닌 ‘영국행’을 택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사실 해외축구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다. 다만, 축구 업계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 선진 축구 문화를 경험해 보고 싶었고, 영어공부도 더 하고 싶었다. 그렇기 위해서 영국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게 됐고, 가서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하더라도 축구와 관련된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하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서른에 해외로 간다는 게 어려웠을 텐데 당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서른 살쯤 되면 이제 직장에서 막내를 벗어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된다. 나도 그런 안정이 싫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었다. 당시에 영국 워킹홀리데이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회사 내에서 타 부서로 옮겨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도 했고, 다른 구단 경력직 최종 면접까지 보기도 했다. 신기하게 그 선택지 중에 딱 워홀만 합격하게 됐고, '아, 영국 가라는 뜻인가 보다'하고 영국으로 떠나게 됐다.


다만 제 주변엔 서른에 워홀 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나이 즈음엔 대부분 직장에서 안정이나 결혼을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나는 축구 일을 계속하기로 한 이상 영국에서 새로운 축구 경험을 쌓고 싶었다. 물론 부모님이 좋아하진 않으셨다. 엄마는 내가 가기 일주일 전쯤에 겁난다고 말하니까 그럼 안 가면 안 되냐고 하더라. 이미 비행기 다 끊어 놨는데...(웃음) 그래도 제가 하는 일에 크게 반대하는 편은 아니셔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셨던 것 같다.


-서른에 해외로 간다는 게 어려웠을 텐데 당시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서른 살쯤 되면 직장에서 막내를 벗어나 대리 정도가 된다. 자리를 잡는 시기다. 정체된다는 느낌을 받아서 환경을 바꿔보고 싶었다. 퇴사 직전에 워킹홀리데이도 지원했고 구단에는 다른 부서에 보내달라는 요청을 계속 했다. K리그 타 구단 최종면접까지 보기도 했다. 근데 그 중에 워홀만 됐다. 회사는 부서를 안 옮겨줬고, 타 팀 면접은 떨어졌다. 남아있는 카드가 하나여서 ‘영국 가라는 뜻인가 보다’ 하고 갔다.


제 주변엔 서른에 워홀 간 사람이 아무도 없다. 대부분 결혼하거나 직장에서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저는 축구 일을 계속하기로 한 이상 축구 경험을 영국에서 쌓으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부모님이 좋아하진 않으셨다. 가기 1주쯤 전에 겁난다고 말하니까 그럼 안 가면 안 되냐고 하더라. 이미 비행기 다 끊어놨는데...(웃음) 부모님은 제 결정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제가 하는 일을 크게 반대하는 스타일은 아니어서 그냥 두신 것 같다.


-영국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토트넘 구단에서 일하게 된 배경과 담당했던 업무는 무엇이 있을까요?


영국으로 간 뒤 런던에 살았다. 영국에 가기 전엔 런던에 무슨 구단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해외 축구에 관심이 없었다. 출국 후 첼시, 아스널, 토트넘, 웨스트햄 구단의 홈페이지를 보면서 구인 공고를 확인했다. 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을 추렸다.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영국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니니 사무직보단 몸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운 좋게 토트넘 스토어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우리 나라와 마찬가지로 서류 심사와 면접 등을 통해 입사하게 됐다. 저도 영국 구단에서 경험을 쌓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구단도 한국인 팬이 워낙 많이 오다 보니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다. 즉, 서로 니즈가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경기 날에 스토어에는 한국인 손님이 약 70~80% 가까이 된다. 그 곳에서 한국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 보니, 항상 같이 일하는 직원들도 그리고 한국인 손님들도 나를 찾았다. 대단한 일은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낯선 이국 땅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또 존중받고 일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토트넘 스토어를 찾은 한국인 팬들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는 양송희 팀장이었다-본인 직접 제공)


-토트넘 스토어에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뽑자면?


토트넘에 있는 동안 가끔 K리그 유니폼이나 머플러를 착용하신 분을 스토어에서 보게 되면 꼭 말을 걸었다. 수원 핸드폰 케이스를 한 남자분, 전북 유니폼을 입은 가족 등이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인천에서 일했다 보니 인천 팬도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어느날, 인천 머플러를 맨 손님이 스토어에 나타났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인천 직원이였다고 다가가서 인사를 드렸고, 그 분과 명함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는데 그 분이 유명한 인천 팬 손수호 변호사님이였다. 지금도 인연이 닿아 종종 연락을 하거나, 경기장을 오며가며 뵐 때마다 반갑게 인사드리고 있다.


-2019년 여름에 한국으로 귀국하셨습니다. 영국에서 자리 잡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나요?


처음부터 영국에서 쭉 자리잡을 생각은 없었다. 계속 사는 것보다 한번쯤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물론 영국에 사는 동안은 좋은 추억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한국 생활이 더 익숙하다 보니 평생 살고싶다는 생각은 안하게 되더라.


# 토트넘 스토어 직원에서 ‘연맹 첫 번째 여성 홍보팀장’으로, ‘도전자 양송희’의 현재


축구 산업 종사자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장 선진적인 리그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를 목표로 삼을 것이다. 양송희 팀장은 토트넘 스토어의 직원으로 근무하며 유럽 축구의 분위기를 경험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했지만, EPL 팀의 일원으로 남는 대신 귀국 후 프로축구연맹에 입사했다. 프로축구연맹에만 세 번 지원했을 정도로 연맹 입사를 원했던 그녀는 “두 번의 실패가 좋은 실패였다”고 말한다. 몇 번의 아쉬움과 다른 경험을 거친 후 목표였던 프로축구연맹에 도달한 과정과 연맹 최초의 여성 홍보팀장이 된 현재에 대해 들어봤다.


-귀국 후 프로축구연맹에 입사하셨는데, 연맹에 들어가기로 다짐했던 계기가 따로 있었나요?


워낙 K리그를 사랑하니까 프로축구연맹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다. 그러던 중, 2019년 여름에 한국으로 돌아온 뒤, 2020년 1월 운 좋게 프로축구연맹 홍보팀 경력직 채용이 떠서 입사하게 됐다. 사실은 프로축구연맹에 세 번 만에 합격하게 된 거다. 이전에 인천에 입사하기 전에는 면접에서 떨어졌었고, 인천 직원이던 시절에도 한번 지원했지만 그때는 서류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앞선 두번의 실패가 감사하다. 처음에 붙었으면 내 인생에 인천이 없었고, 두 번째에 붙었으면 내 인생에 토트넘이 없었을 테니까. 좋은 실패였다고 생각한다.


-연맹 입사 후 담당하는 업무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입사 후 지금까지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다. 처음 들어갔던 20년 1월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개막이 연기되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다. 축구 경기를 안 하니 기자 분들도 기사를 쓸 소재가 없었고, 저희 홍보팀도 홍보할 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매주 마다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 기획 기사 형식의 보도 자료를 쓰곤 했는데 주로 옛날 기록이나 선수 관련 재밌는 데이터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당시 개막하기 전까지 거의 보도자료 공장처럼 보도 자료를 썼던 기억이 난다. 너무 힘들었지만, 또 좋은 훈련이 된 것 같기도 하다.


(2020년 연맹 입사 후 경기 현장 근무-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2024년 시작과 동시에 한국프로축구연맹 첫 여성 홍보팀장직을 수행하게 됐습니다. 기쁨과 부담을 동시에 느꼈을 것 같은데 당시 기분은 어떠셨나요?


감사한 마음도 들었지만 겁도 났다. 전임 팀장님들이 다 너무 훌륭하셨기 때문에 내가 잘 할수 있을까 부담도 됐다. 동시에 지금 나름의 인정을 받아 팀장이 된 현재의 나보다, 인천에서 막내 시절의 내가 많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어렸고, 많이 부족했고, 또 고생도 많이 했었는데 그때 버텨준 내 자신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걱정이 많았을 텐데 주변의 조언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걱정도 있었지만 주변에서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너보다 오래 일했던 윗사람들이 네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서 너한테 그 자리를 맡긴거다"는 얘기와 함께 용기를 줬다. 지금도 스스로 모든 면에서 만족하지는 않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일을 해 나가고 있다.


‘IF 기자단’ 3기의 말: 양송희 프로축구연맹 홍보팀장이 전하는 축구계 실무 이야기와 조언은 (2편)에서 계속됩니다.


콘텐츠 제작='IF 기자단' 3기


글=박현일, 김지윤


사진=이정유


자료 조사=곽성호, 이동우


현장 취재=이정유, 이동우, 조준형


포포투 fourfourtwo@fourfourtwo.co.kr

ⓒ 포포투(https://www.fourfourtwo.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포포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