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스스로 얼굴 드러낸 메신저

정우상 기자 2024. 5. 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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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민주 국가에서 정상들 간 메신저는 외교관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외교 장관이나 안보 보좌관들이 접촉한 뒤 정상회담을 통해 최종 결론을 내린다. 양측 메신저들의 사전 협상에서 중요 결론이 내려지기 때문에 정작 정상회담은 요식 행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북한 같은 국가에선 외교관들보다 절대 권력자의 비선을 통해 협상이 전개된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성사되기까지 북한과 일본은 1년간 비밀 협상을 했다. 고이즈미의 메신저는 다나카 히토시라는 외교관이었고, 김정일의 메신저는 ‘미스터X’였다. 다나카와 미스터X 간 채널이 만들어졌지만, 양측은 서로를 의심했다. 다나카는 북한이 억류 중이던 일본 기자의 석방을 X에게 요구했는데 얼마 뒤 정말 기자가 석방됐다. X에 대한 검증이 이뤄진 것이다. X 역시 1년 동안 일본 신문의 총리 동정 기사를 읽으며 다나카가 고이즈미를 88회 접견한 사실을 확인했다. 메신저의 생명은 보안이다. 미스터X의 존재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 역사에서 메신저는 때론 목숨을 걸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태조가 머물던 함흥으로 문안 메신저를 보냈다. 한양으로 돌아와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을 미워했던 이성계는 아들이 보낸 메신저들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뒀다. 그때 메신저는 차사(差使)라고 했다. ‘함흥차사’라는 말까지 만들어졌다.

▶병자호란 때 이조판서 최명길은 홍타이지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의 한양 진격을 막겠다며 인조에게 특사를 자청했다. 청군과의 협상 명목이었지만 실제는 인조가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시간 끌기용 특사라는 사실이 청에 발각되면 최명길의 목숨이 위험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메신저를 자처했던 최명길 덕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대피할 시간을 벌었다.

▶주요 정치인들은 내용이 공개되면 난처해지는 협상에서 메신저를 활용한다. 그래서 메신저의 기본은 무거운 입과 이를 보증할 믿음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회담 성사 과정에서 메신저가 있었다는 사실이 공개됐는데, 이를 공개한 사람들이 다름 아닌 메신저 당사자들이다. 메신저들이 얼굴을 스스로 드러낸 것도, 윤 대통령이 “차기 대선 경쟁자가 될 인사를 비서실에 기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이 대표에 전했다는 내용까지 공개한 것도 황당하다. 메신저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면 그런 메신저를 선택한 사람들이 특이한 것이다.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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