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밀사의 커밍아웃
국내 정치든, 국제 정치든 출구 없이 꽉 막혔을 때 종종 ‘밀사(密使)’가 등장한다. 미·중관계 정상화를 끌어낸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1971년 비밀 방중이 대표적이다. 밀명을 이어주는 밀사의 조건은 역설적으로 신뢰다. 어떤 이야기든 솔직하게 꺼내놓으려면 비밀에 부쳐진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의 비밀회담 핵심 내용이 온전히 공개된 것은 2002년 미 국가안보문서보관소가 회담 문서들에 대한 비밀을 해제하면서였다.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회동을 둘러싼 비공식 특사 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비공식 특사’니 곧 밀사인 셈이다. 요약하면 총선 참패 후 윤 대통령 지시로 함성득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이 이 대표 측 임혁백 전 민주당 공천관리위원장과 회동 성사를 조율했다는 것이다. 서로 신뢰가 낮은 상황을 감안하면 밀사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윤·이 회동 열흘도 안 돼 밀사역을 맡은 메신저들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내밀한 내용까지 낱낱이 털어놓으니 놀라울 수밖에 없다.
그중엔 상식을 벗어나는 내용들도 적지 않다. 윤 대통령이 국무총리 추천을 이 대표에게 제안하고 비서실장 후보에서 “이 대표와 경쟁관계인 인물은 배제하겠다”는 뜻도 전했다고 한다. 이 대표 수사도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한 것이니 “우리는 같은 처지”라 하고, 골프 회동도 거론했다고 한다. 여당 지지층이 “진짜 보수 궤멸자다. 지금 당장 탈당하라”고 부글부글하는 게 무리는 아니다.
대통령실과 이 대표 측 모두 비밀 접촉은 없었다는 부인과 함께 불쾌감을 표시하고, 여야도 일제히 “허장성세”라며 이들의 처신을 문제 삼는다. 밀사의 공식을 파괴한 ‘커밍아웃’은 왜일까. 좋게 보자면 첫 윤·이 회담의 성과가 약했던 만큼 동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윤 대통령이나 이 대표에게 정치적 부담만 더했다. 향후 어떤 형태로든 허심탄회한 이야기가 오가기는 어려운 구조가 됐다. 밀사는 말 그대로 막 뒤에서 역할을 다할 때 당장 빛나지 않아도 역사의 세례를 받게 된다. 노련한 두 정치학자의 때이른 커밍아웃이 아쉬운 이유다.
김광호 논설위원 lubof@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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