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진료비 게시 의무 항목, 많다고 좋을까

이학범 수의사·데일리벳 대표 2024. 5. 8.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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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범의 펫폴리] 정부 고시로 11개에서 20개로 늘어날 예정… “진료 항목 범위 불분명” 지적

※ 반려동물 인구 1500만 시대. 반려동물과 행복한 동행을 위해 관련법 및 제도가 점점 진화하고 있다. ‘멍냥 집사’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반려동물(pet)+정책(policy)’을 이학범 수의사가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요즘 동물병원에 가면 일부 진료비가 벽면에 써 붙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동물진료비 게시'가 지난해 의무화됐기 때문입니다. 몇몇 병원에선 게시된 종이를 찾아볼 수 없는데, 이 경우 병원 홈페이지에서 진료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동물진료비 게시제’가 의무화됐다. [GETTYIMAGES]

정부 "항목 늘린다" 행정 예고

동물진료비 게시제는 지난해 1월 '수의사가 2명 이상 있는 동물병원'을 대상으로 시행됐습니다. 올해 1월부턴 수의사가 원장 1명인 '1인 동물병원'으로 확대됐는데요. 수의사가 없는 동물병원은 존재하지 않기에 모든 동물병원은 진료비를 게시해야 합니다. 현재 의무적으로 진료비를 게시해야 하는 진료 항목(11종)은 다음과 같습니다.

앞으론 이 항목이 더 늘어납니다. 최근 정부가 '진료비용을 게시해야 하는 동물진료업의 행위 고시 제정안'을 행정 예고했기 때문입니다. 이 제정안에 따르면 혈청화학검사, 전해질검사, 초음파검사, 컴퓨터단층촬영검사(CT), 자기공명영상검사(MRI) 비용과 더불어 심장사상충 예방약, 외부기생충 예방약, 광범위 구충제 등 투약·조제비가 새로 추가됩니다(표 참조). 앞서 추가가 확정된 '개 코로나바이러스백신 접종비'를 포함하면 항목은 20개가 됩니다.

진료비 게시 항목이 증가하면 소비자의 알권리가 일부 충족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좋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벌써 현장의 혼란이 예상됩니다.

먼저 게시 대상으로 지목된 진료 항목 범위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혈청화학검사는 "기본검사와 종합검사 키트로 나뉘는 경우 종합검사를 기준으로 한다"고 설명돼 있습니다. 문제는 일선 수의사들이 "기본검사는 어디까지고 종합검사는 어디까지냐"고 반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동물병원에서 사용하는 혈액검사 기기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합니다. 기계별로 검사할 수 있는 항목 종류가 전부 다르고, 같은 장비를 쓰더라도 선택에 따라 혈액검사 세부 항목 개수가 달라집니다. 이를 단순히 기본과 종합으로 구분하고 혈액검사 비용 및 판독비를 게시하라고 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는 거죠.

심장사상충 예방비도 문제입니다. 심장사상충 예방에는 먹는 약, 바르는 약, 주사제가 모두 사용됩니다. 같은 약이라 해도 체중에 따라 처방되는 용량이 모두 다르고, 주사제는 한 번 투약으로 효과가 6개월간, 12개월간 지속되는 게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1회 투약 및 조제'를 기준으로 금액을 게시하라고 하니 수의사 입장에선 난감할 따름입니다.

이대로 진료비 게시 항목이 확정되면 수의사마다 다른 기준을 적용해 진료비를 게시하거나 ◯◯◯~△△△원처럼 금액을 범위로 게시해놓을 겁니다. 또 같은 항목이라도 진료비를 하나만 적는 게 아니라 A는 ◯◯◯원, B는 △△△원, C는 ▢▢▢원처럼 여러 개 적어둘 수밖에 없죠. 이 경우 큰 문제가 생깁니다. 정부의 진료비 게시제 시행 목적은 '소비자 알권리 충족' '동물진료비 투명성 확보' '진료 선택권 강화'입니다. 소비자(반려동물 보호자)로 하여금 진료비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동물병원을 선택할 수 있게 하겠다는 거죠. 하지만 병원마다 다른 기준으로, 심지어 여러 개 가격을 범위로 적어놓는다면 소비자가 오히려 혼란스럽지 않을까요. 제도 시행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반려동물 보호자 혼란 가중 우려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진료비 게시제는 게시로 끝나지 않고 동물진료비 공시제와 연동됩니다. 정부는 1년에 한 번씩 각 동물병원이 게시한 진료비를 조사해 지역별로 중간비용, 평균비용, 최저비용, 최고비용을 공개하는 '공시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동물병원 진료비 현황조사 공개 홈페이지'(www.animalclinicfee.or.kr)에서 누구나 시도별, 시군구별 진료비를 확인할 수 있죠. 그런데 각 동물병원이 진료비를 ◯◯◯원이 아니라 ◯◯◯~△△△원, 혹은 A는 ◯◯◯원, B는 △△△원, C는 ▢▢▢원이라고 적어놓으면 과연 지역별로 비용 조사·비교를 정확히 할 수 있을까요. 진료비 공시제는 현재도 "공개된 진료비의 최저비용, 최고비용이 실제와 다르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정보가 부정확하기 때문에 실제로 활용하는 보호자도 드뭅니다. 지금도 상황이 이런데, 진료비 게시 항목만 늘리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부는 진료비 게시 항목을 11개에서 20개로 늘려 "소비자 알권리와 동물진료비 투명성, 진료 선택권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합니다. 앞으로도 진료비 게시 항목 개수를 계속 늘려나가겠다는 방침입니다. '11→20→40→100개'라는 숫자만 놓고 보면 정부가 정책을 잘 펼치는 것 같고 제도가 점점 발전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지금처럼 기준이 부정확한 상황에서 진료비 게시 항목 개수만 늘리는 게 정말 소비자에게 도움이 될지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행 동물진료비 게시 의무 항목 11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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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범 수의사·데일리벳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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