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성별 불일치’ 고통 외면한 채…대법·국회, 기준 정비 손놔

오세진 기자 2024. 5. 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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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서 외모와 서류 달라 불이익
“대법예규 개정·국회 법 제정을”
1년전 인권위 권고에도 답없어
국외선 수술 강제 않는 추세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성소수자부모모임 등 성소수자 인권단체 회원들이 2021년 11월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수술요건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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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등록부 성별을 ‘남’에서 ‘여’로 정정하는 것을 허가한다.”

30대 트랜스여성 ㄱ씨가 지난달 4일 받은 법원 결정문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문구”다. “이 말도 마음에 들었어요. ‘출생 당시의 성(별)인 남성이 아닌 전환된 성(별)인 여성이라고 평가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요. 이제 법적으로도 ‘여성’임을 인정받아 안심되고, 안전해진 느낌이에요.”

그는 성기 성형과 생식능력 제거 등 성확정 수술을 받지 않았으나 지난달 청주지법 영동지원으로부터 성별 정정을 허가받은 트랜스여성 다섯 중 한명이다. 지난해 6월 “성확정 수술 여부가 성별 정정 허가 기준이 되어선 안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법원에 신청서를 낸 지 약 10개월 만이다.

지난달 28일 한겨레와 만난 ㄱ씨는 외모도 목소리도 ‘여성’이었다. 직장 동료들도 그를 여성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보이는 모습과 서류상 성별이 일치하지 않아 불이익과 불편을 겪어야 했다. 남성으로 표기된 ‘신분증’을 보이는 순간 달라지는 시선이 불편해 치료가 필요한데도 병원에 가길 꺼린 적도 있다. “병원에 가서 신분증을 내면 (의사를 비롯한 직원들이) 속삭이며 저를 빤히 쳐다볼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아파도 병원을 잘 안 가려고 했어요.”

애초 그는 법원이 성별 정정을 허가해줄 거라고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대법원이 예규인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이하 사무처리지침) 제6조 제3·4항은 성전환 수술 여부와 생식능력을 상실했는지 등을 참고사항으로 규정하는데, 일부 법원은 이 기준에 따라 성별 정정 허가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ㄱ씨를 포함한 성별 정정 신청인들의 소송대리인 송지은 변호사는 “지난해 2월 서울서부지법이 성기 성형과 생식능력 제거 수술을 하지 않은 트랜스여성의 성별 정정을 허가했지만, 그 이후에도 성확정 수술을 받지 않은 신청인에 대해 성별 정정을 불허한 법원이 있었다”며 “생식능력이 확실히 제거됐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재판부도 많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6월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에서 열린 ‘미니 퀴어퍼레이드’에서 학생들이 옷에 그린 무지개 문양.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5월 법원이 성별 정정 허가 여부를 결정할 때 사무처리지침 제6조 제3·4항을 활용해 “개인에 대한 인격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대법원장에게 지침 전반을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더불어 “가족관계등록부 성별 정정은 법률로 그 대상 및 절차를 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국회의장에게 성별 정정 요건과 절차, 방법 등을 담은 특별법 제정을 권고했다.

인권위 권고가 나온 지 1년이 지났지만 트랜스젠더가 성별 정정 과정에서 기본권을 침해받을 가능성은 여전한 상황이다. 법원행정처는 7일 한겨레에 “사무처리지침 개정을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면서도 “구체적인 개정 방안이나 개정 시기는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국회도 성별 정정 기준 등을 규정한 법 제정에 손을 놓고 있다. 2002년 김홍신 당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의원과 2006년 노회찬 민주노동당(현 정의당) 의원이 성별 변경에 관한 특별법안을 대표 발의한 적이 있으나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선 장혜영 정의당 의원이 성확정 수술을 받지 않더라도 성별 정정을 할 수 있도록 한 ‘성별의 법적 인정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했지만, 임기 만료(5월29일)를 한달도 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법안 발의에 필요한 최소 의원 수 10명(현재 9명)을 채우지 못했다.

국외에선 성별 정정 허가 요건으로 성확정 수술을 강제하지 않는 나라가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해 10월 ‘성동일성 장해자(트랜스젠더를 의미)의 성별 취급의 특례에 관한 법률’에서 성별 정정을 위해 난소 또는 정소와 같은 생식선이 없을 것 또는 생식선 기능이 영속적으로 결여된 상태에 있을 것을 요구한 조항이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이외에 영국과 네덜란드, 헝가리, 프랑스,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등도 성별 정정 허가 요건으로 성확정 수술을 강제하지 않는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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