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협상, 농업구조 변화 신호탄…농가 생존전략 찾기 ‘몸부림’

관리자 2024. 5. 8. 05: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상전벽해 60년, K-농업을 말하다] (6) 농산물시장 개방과 응전…UR 협상과 한국농업
농산물 관세·보조금 철폐 조준
다자무역협상 농업의제 첫 포함
경험·정보·준비 부족 탓 대혼란
‘예외없는 관세화’ 쌀시장 위협
건국 이래 최대 농민시위 촉발
“한국농업 타격 컸다” 평가 많아
거스를 수 없는 거센 개방 물결
경쟁력 높여 해외 진출 모색을

지난 4월15일은 30년 전인 1994년 모로코 마라케시 각료회의에서 회원국들이 우루과이라운드(UR) 최종 협상 결과에 서명을 한 날이다. UR은 1986년 9월에 협상이 시작돼 무역과 관련한 거의 모든 의제를 다루며 8년 동안 이어졌다. 이처럼 광범위한 영역을 포괄하는 엄청난 협상이 일괄 타결된 것은 다자무역협상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다자무역협상 경험이 없었던 우리에게 UR은 생소한 무대였으며, 특히 수출국의 시장 개방 요구가 거셌던 농업협상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UR 협상과 국내 농업계 대응을 돌아보며 미래농업의 길을 짚어본다.

UR은 1948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탄생한 이래 여덟번째 진행된 다자무역협상이었다. 그동안 협상은 선진국들 중심으로 이뤄졌고 주로 공산품 관세 인하를 의제로 다뤘다. 개발도상국이며 경제발전 수준이 뒤떨어져 있던 한국은 UR 이전에는 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UR에서는 상품 무역 이외에 서비스 무역이 새로 포함됐고 그동안 다루지 않던 농산물 교역까지 협상 테이블에 올라오며 참가국도 크게 늘었다. 종전의 다자무역협상과는 차원이 다른 협상이었던 것이다.

역대 가장 강력한 농민 시위 촉발한 우루과이라운드

1993년 12월7일 서울역 일대에서 농민·소비자 등 3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개된 ‘쌀 수입 개방 저지 범국민 대회’.

GATT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자유무역이며, 다자무역협상을 통해 무역장벽을 계속 낮춰왔다. 하지만 농업은 식량안보와 관련된 산업이라 자유무역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 모든 국가의 기본적인 인식이었다. UR 이전 일곱차례의 다자무역협상이 있었지만 농업만큼은 협상에서 예외 분야였던 이유다.

그렇다면 UR에는 농업이 왜 포함됐는가? 농업이 협상 테이블에 오르게 된 것은 수출국을 중심으로 농산물 무역이 지나치게 왜곡됐다는 불만이 커졌기 때문인다. 이처럼 농산물 무역을 왜곡시킨 주역은 미국과 유럽연합(EU)이다. 미국의 엄청난 보조금, EU의 가변부과금(variable levy)과 같은 일종의 높은 관세가 무역을 왜곡시키는 대표적인 정책들이었다. 더구나 이들 국가의 과다한 농업보호 정책으로 생산이 늘어났고, 남아도는 농산물을 국제시장에 덤핑(헐값)으로 수출하자 농산물 수출국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 UR에서 농업이 최초로 협상 의제에 포함된 것이다. 문제는 농업협상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미국과 EU였는데 엉뚱하게 한국·일본·스위스 같은 식량 수입국들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점이다.

UR에서 농업협상은 가장 입장 대립이 치열하고 합의가 어려운 분야였다. 4년 만에 끝내기로 한 협상이 8년까지 길어진 것도 농업협상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국내에서도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농업협상에 대한 엄청난 반발이 있었다. 협상 도중에 농림부 장관이 여러명 물러나는 불행한 일도 겪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속에 한 농민단체는 UR이 제2의 을사조약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93년 12월 마지막 협상이 임박한 시점에서 농민단체들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쌀시장 개방 반대를 고수해줄 것을 요구했다. 1994년초에는 전국농민회 등 농민단체들이 건국 이래 최대 농민대회를 열어 협상 무효를 선언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협상은 1994년 4월 최종 타결됐지만 그 이후에도 농민단체들은 비준 반대, 재협상 요구 등 극심한 투쟁을 벌였는데 이는 우리 역사 이래 농민들의 가장 강력한 시위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협상 조직·정보력 한계, 많은 시행착오

1993년 12월16일 당시 민주자유당 국제화전략특별위원회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당사에서 개최한 ‘우루과이라운드(UR) 이후 농수산 대책에 관한 토론회’.

왜 이처럼 엄청난 혼란을 겪었을까? 돌이켜보면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UR을 제대로 몰랐고 준비가 부족한 탓이 가장 크다. 다자무역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본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관련 전문가도 없었고 4대국(미국·EU·일본·캐나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협상에 대한 충분한 정보도 없었다. 농림부만 해도 국제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은 1개 과가 전부였으며 그마저 소관 업무는 협상과 관계없는 일들이었다. UR이 진행되면서 조직은 국 단위로 확대됐지만 당시 경험과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협상에 참여한 직원들은 큰 고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뿐만 아니라 언론도 정확한 협상의 흐름이나 실상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언론들이 관련 협상이 타결되면 우리 농업이 완전히 망할 것처럼 보도하면서 농민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 결과 농민단체를 중심으로 결사적인 반대, 격렬한 시위가 계속 이어져 국가 전체가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게 됐다. 정부가 협상 내용을 열심히 설명해도 이미 언론을 통해 국민 머릿속에 박힌 인식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또한 협상은 어느 한쪽의 입장만 반영되기 힘들고 양쪽 입장을 조금씩 타협하면서 합의에 이른다. 하지만 국민 눈에는 타협 과정에서 마치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입장을 바꾸는 것처럼 보여 정부에 대한 불신이 쌓여갔다. 이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UR 농업협상은 국경보호, 국내보조, 수출보조 세분야로 나뉘었다. 국경보호는 주로 수입 장벽, 국내보조는 농업을 지원하는 국내 정책, 수출보조는 말 그대로 수출 농산물에 대한 보조다. 세분야와 관련된 각국의 정책 중 무역을 왜곡하는 정책들을 철폐한다는 것이 당초 협상 목표였다.

하지만 수입국들, 선진국들의 반발이 심해지면서 이같은 원칙은 협상이 진행될수록 많이 퇴색했고 ‘철폐’ 대신 ‘감축’으로 바뀌었다. 세분야 중 수출보조는 우리와 관련 없는 분야고, 국내보조는 무역을 왜곡시키는 정책은 감축하되 나머지 정책은 허용하도록 했다. ‘감축’할 정책과 ‘허용’ 되는 정책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경우 쌀 수매가 가장 대표적인 감축 정책이었고 대부분 정책은 허용 정책으로 분류돼 실제로 UR 이후 농업구조정책을 위한 예산이 크게 늘었다.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국경보호 분야였다. 수입제한을 철폐하고 이를 예외 없이 관세로 전환한다는 원칙이 가장 큰 난관이었다. 주요 품목에 수입제한 조치를 유지했던 우리나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치였다.

특히 쌀시장을 전면 개방하는 것은 우리 농업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예외 없는 관세화’를 두고 한국과 일본이 쌀만은 수입제한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막판까지 진통을 겪었다. 결국 1993년 12월 마지막 협상에서 쌀은 관세화를 유예하는 대신 최소한의 물량으로 시장을 열어준다는 선에서 합의를 이뤘다.

거스를 수 없는 개방 물결, 농업 해외 진출 길 찾아야

쌀시장 개방이 선언된 후 민주당은 1994년 1월29일 서울 국회 귀빈식당에서 ‘UR 협상 대처방안 모색을 위한 농민단체 초청 간담회’를 열었다.

협상 결과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지만 UR로 농업이 개방되고, 이로 인해 한국 농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영향을 정량적으로 분석한 연구들도 있는데 정량적 분석은 기본 가정이나 분석 방법에 따라 결과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떠나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UR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 우리 농업의 모습이 달라졌을까 하는 것이다.

다양한 견해가 있겠지만 우리 농업이 개방의 물결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UR이 아니더라도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 농업시장 개방에 대한 압력이 나타났고 UR 협상에서도 이중관세 설정, 수입쿼터 관리 등 주요 품목을 지키기 위한 장치들은 많이 있었다. UR 이후에도 자유무역협정(FTA) 등으로 시장은 점점 더 개방되고 있다. 거스를 수 없는 개방의 물결에 저항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농업의 미래는 경쟁력 있는 분야를 찾아 개방에 대응하고 나아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달려 있을 것이다.

배종하 전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베트남사무소장·전 도하개발어젠다(DDA) 농업협상 한국 측 대표

Copyright © 농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