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로 15년 전 성범죄 자백… 대법 “증거 안 돼”

방극렬 기자 2024. 5. 8.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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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으로 사건 돌려보내
“피해자 진술과 달라 신빙성 낮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전경./뉴스1

한 남성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유서를 통해 자백한 15년 전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기소된 공범들에 대해 이 유서를 증거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 사건은 2021년 3월 A씨가 숨지며 남긴 유서가 발단이 됐다. 이 유서에는 2006년 중학교 3학년이던 A씨가 친구 3명과 함께 같은 학교 2학년 여학생을 불러 술을 먹이고 집단으로 성폭행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A씨는 유서에서 “그날 왜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고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며 “이 사건이 꼭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A씨 사망 사건을 수사하다 유서를 확인한 경찰은 성폭행 사건에 대한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피해자와 A씨가 공범으로 지목한 3명 모두 당시 상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검찰은 당시 술에 취한 채 귀가했고, 속옷에 피가 묻어 있었다는 등의 피해자 진술이 유서 내용과 맞는다고 보고 남성 3명을 기소했다.

재판의 쟁점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인 A씨 유서를 법원의 유죄 판단 근거로 쓸 수 있는지였다. 현행법은 유서 내용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만하면 유죄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1심은 “피해자 진술을 봐도 당시 성폭력을 당했는지가 명확하지 않고, 이 사건 직후 산부인과 진료 과정에서도 성폭력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을 볼 때 유서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2심은 유서 내용을 믿을 수 있다면서, 3명에게 각각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2심은 A씨가 중학교 친구들을 무고할 동기가 없는 데다, 유서 내용이 구체적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피해자 진술도 있다며 신빙성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유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며 2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7일 밝혔다. 대법원은 “A씨가 유서 내용처럼 오랜 시간 상당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기억이 과장되거나 왜곡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피고인들과 A씨 중 일부만 범행을 하고 나머지는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이어 “유서 주요 내용이 다른 증거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고, 일부 내용은 피해자 진술 등과 명백히 배치된다”고 판단했다.

한 법조인은 “이 사건 주요 증거인 A씨의 유서를 유죄 판단 근거로 쓸 수 없으면 파기환송심이 무죄로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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