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쟁·말꼬리 잡기, 토론 오염시키는 일
“1994년 미국에서 귀국하고 제 마음대로 수업을 해도 되는 때부터 한 학기도 빠지지 않고 토론 수업을 이끌어 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한 번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7일 서울 종로구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 출간 간담회에서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9년간 공들인 책 ‘숙론’(김영사)을 쓰게 된 이유를 밝혔다. ‘토론 수업이 왜 이렇게 잘 안 될까?’는 교수로서 그의 오랜 화두였다. 말하기 좋아하는 학생이 차고 넘치는 미 하버드대에서 토론 수업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는 그에게 토론하지 않는 한국의 대학은 낯설었다.
학생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한 반면 “평균보다 말 못하는 사람들이 여의도에 앉아 있다”는 게 최 교수의 지적. “토론하라고 하면 말꼬리 잡고 싸움하고 언쟁하기 바쁩니다. ‘토론’이라는 단어 자체가 오염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숙론(熟論)’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숙론은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한다. 최 교수는 “제압하려고 덤벼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이야기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자세”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숙론이야말로 ‘불통 사회’를 ‘소통 사회’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다. 에필로그에는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300명 국회의원 한 분 한 분에게 일일이 사인해서 선물하고 싶다’고 적었다. “저 양반들에게 숙론을 제대로 하게 하면 나라가 달라질 텐데….”
이날 최 교수는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생태학자로서, 소통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는 인류를 따끔하게 혼내기도 했다. “수컷 귀뚜라미는 가을이 되면 식음을 전폐하고 긁어대며 소리를 냅니다. 한 마리 암컷과 짝짓기하는 것이 탄생의 목표이기 때문에 악착같이, 죽을 힘을 다해서 합니다. 소통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책은 199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몽플뢰르 콘퍼런스’ 등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숙론의 성공 사례를 소개한다. 2018년 김동연 경제부총리 시절 기획재정부 중장기전략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각계각층 전문가 스무여 명과 숙론을 벌였던 일화도 담았다.
최 교수는 “퇴임 후 숙론의 장을 만드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가장 먼저 던지고 싶은 화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지체 없이 “저출생”이라고 했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가장 힘든 주제에 덤빌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나 어느 한 부처가 풀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거든요. 몇 년이 걸리더라도 피할 수 없는 주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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