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심이 시작됐다, 피고인석이 빈 채로

문상현 기자 2024. 5. 7.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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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시작돼 살인으로 기록된 송정저수지 화물차 추락 사건 재심이 시작됐다. 피고인은 21년 만에 다시 재판을 받게 됐지만 법정에 오지 못했다. 그는 재판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2003년 7월9일 화물차 추락 사고가 발생했던 전남 진도군 의신면 송정저수지 입구 삼거리.ⓒ시사IN 조남진

피고인은 오지 않았다. 변호인과 검사, 재판부가 법정에 차례로 들어와 각자 자리에 앉을 때도, 재판장이 재판 시작을 알릴 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응급 상황이나 불가피하게 참석하지 못할 긴급한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미리 법원에 불출석 허가를 받지도 않았다. 피고인은 앞으로도 법정에 오지 않는다. 올 수 없다. 그는 재판 보름 전 세상을 떠났다.

피고인은 무기수 장동오씨다. 2003년 7월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돼, 21년째 복역 중이었다. 보험금을 노리고 전남 진도군 송정저수지에 자신이 운전하던 화물 트럭을 고의로 추락시켜 조수석에 탄 아내를 숨지게 했다고 법원 판결문에 적혀 있다. 장동오씨는 트럭 추락 직후부터 경찰과 검찰 수사, 이어진 재판 과정에서 졸음운전으로 발생한 사고였다고 반박했다. 아내를 살해할 의도도, 이유도 없다고 항변했다.

과거 수사 과정에서 살인 혐의에 대한 직접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교통사고로 판단해(교통사고특례법 위반 혐의) 장씨를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송치했지만, 검찰 수사 단계에서 살인 혐의가 적용됐다. 검찰은 정황증거를 종합해 장씨를 재판에 넘겼고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장동오씨는 유죄가 확정된 이후에도, 21년 복역 중에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반성하지 않는 무기수’의 주장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2017년, 처음으로 장동오씨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이 나타났다. 충남 서산경찰서 소속 현직 경찰관이던 전우상 전 경감이었다. 그는 장씨 사건을 되짚으면서 석연치 않은 지점들을 발견했고, 이후 일반 형사사건 재심 전문인 박준영 변호사가 이 사건을 맡았다. 이 과정에서 장씨의 무죄 주장을 입증할 새로운 증거와 유죄 확정판결의 핵심이던 정황증거들의 허점이 드러났다. 장씨는 박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네 번째 재심을 청구했다. 2021년 12월31일이었다(〈시사IN〉 제773호 ‘사건인가 사고인가 19년 전 그날의 진실’ 기사 참조).

재심은 청구 즉시 열리지 않는다. 법원이 다시 재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심리하는 엄격하고 신중한 절차를 먼저 거쳐야 한다. 심리 결과에 따라 법원은 재심 개시 여부를 결정한다. 통상 서면으로 진행되는 절차이지만 장씨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재심 청구인 측과 검찰을 법정으로 불러 직접 의견을 듣겠다고 했다.

2022년 9월6일, 법원은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롭게 발견됐다’며 장동오씨가 다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이 결정에 불복해 항고했으나 고등법원도 재심이 필요하다고 결정했다(검찰 항고 기각). 고등법원은 앞선 법원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은 고등법원 결정에 대해서도 재항고했지만 대법원이 기각하면서 2024년 1월 재심 개시가 확정됐다. 장동오씨가 재심을 청구한 지 2년 1개월 만이었다.

재심 전문인 박준영 변호사가 장동오씨의 사건을 맡았다.ⓒ시사IN 이명익

교도소에서 들려온 소식

박준영 변호사는 1월 재심 개시가 확정된 직후 장동오씨에 대한 형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총 세 차례의 앞선 법원 심리 단계에서 ‘원심(유죄) 판단’을 유지할 수 없는 새로운 증거들이 확인됐고, 재심으로 사건 전반을 다시 다투게 된 만큼 무기징역이라는 형의 집행을 멈춰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형 집행정지 허가 여부를 결정하는 검찰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재판부 인사이동까지 겹치면서 처분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장씨가 재심을 앞두고 복역 중이던 군산교도소에서 재심 법정이 가까운 해남교도소로 이감된 이후에도, 재판 첫 기일이 지정된 이후에도 형 집행정지 신청 결과에 대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3월28일, 박준영 변호사는 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 일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피고인(장동오씨)은 지난 3월20일 군산교도소에서 해남교도소로 이감됐습니다. 이감 후 복통과 머리 어지러움을 호소하여 소내에서 진료를 받았고 이상이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A 종합병원에서 검진을 거쳐 B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담당 교도관으로부터 확인한 바로는, 병원에서 혈액암이 의심된다는 진단을 받았고 입원 치료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병원으로부터 피고인의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진단서 등을 발급받아 제출하겠습니다. 피고인이 보호와 지원 아래 병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형 집행정지’를 고려하여주시기 바랍니다.”

장씨는 해남교도소 이감 과정에서 종합검진을 통해 이상 소견을 발견했다. 종합병원은 급성 백혈병이라고 진단했다. 병은 순식간에 악화됐다. 장씨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옮겨졌고 4월1일부터 독한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당일 박준영 변호사가 장씨를 찾았을 때 그는 왼손과 왼발에는 수갑을, 오른발에는 전자발찌를 차고 있었다. 이날 박 변호사를 알아본 장씨는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재심 재판 참석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이틀 뒤인 4월3일 오전, 검찰은 형 집행정지를 허가했다. 박 변호사가 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나서야 뒤늦게 장씨의 긴급한 사정을 확인한 결과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5시, 장씨는 세상을 떠났다.

장씨가 법정에 오지 않아도 재심 재판은 계속된다. 일반 형사사건은 피고인이 숨지면 ‘공소권 없음’으로 재판이 중단되지만, 재심 사건은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형사소송법 주석서 665쪽) 궐석재판으로 진행할 수 있다. 과거사 사건이 아닌 일반 형사사건 재심에서 피고인 없이 재판이 진행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재판 과정에서 재심 청구인 장씨에게 물어야 할 내용들은 더 이상 묻지 못한다. 증인으로 출석할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에 대해 장씨를 통해 확인해야 할 내용도 이제는 확인할 수 없다. 과거 수사 기록 속 장씨 진술, 재심 청구 전후 변호인과의 면담 과정에서 했던 말들이 법정 안 비어 있는 장씨 자리를 채우게 된다.

“피고인이 사망한 상태로, 피고인 출석 없이 재판을 진행하겠습니다.” 광주지방법원 해남지원 형사 1부(박현수 재판장)는 4월17일 오전 10시30분 재판 시작을 이렇게 알렸다. 이날 재판은 공판준비기일로 진행됐다. 박준영 변호사가 앞서의 3월28일 의견서를 통해 재판부에 요청한 결과다. 당초 이날 재판은 공판기일, 즉 본격적인 재심 본안 재판이 시작되는 날로 지정됐지만 장씨가 급성 혈액암 진단을 받은 직후 박 변호사는 치료 등을 위해 공판준비기일로 변경해달라고 요청했다. 공판준비기일은 항암치료를 시작한 장씨가 의무적으로 출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재심 개시 여부 결정을 위한 심리 과정에서 줄곧 법원의 판단에 불복해온 검찰 측은 이날 장씨 사망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앞으로 장씨 사건 재심은 우선 증인신문 중심으로 진행된다. 4월17일 공판준비기일에서 검찰과 변호인 측은 증인신문 일정을 합의했다. 검찰 측이 증거로 재심 재판부에 제출한 과거 수사 기록(2003년 사건 발생 당시 작성)에서 다양한 오류가 발견돼 장씨 측이 재심을 청구한 만큼, 과거 기록들과 함께 증인들의 증언, 새롭게 확인된 새 증거 등을 비교하며 검찰·변호인·재판부가 재심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게 된다.

21년 만에 다시 검증하는 그날의 사고

증인들은 크게 네 그룹으로 나뉜다. △2003년 사건 발생 당시 구조에 가장 먼저 투입됐거나 인양 작업을 맡은 민간 잠수부, 트럭 추락 사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조대 등(사건 발생 당시 정황 관련 증인 그룹) △수사 경찰, 당시 사고 트럭을 감정하고 장씨 아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 재심 청구 과정에서 과거 수사와 감정, 부검 등에서 각종 오류를 찾아낸 전 국과수 원장, 법공학자 등(과거 수사 및 감정 관련 그룹) △과거 장씨가 아내를 살해한 핵심 동기로 지목된, 부부의 보험 가입 정황과 사유를 설명할 보험설계사 등(보험 쟁점 관련 그룹) △장씨 유가족과 지인 그룹 등이다. 사건 발생 직후부터 시간순으로, 사건 속 쟁점별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증인신문이 이뤄진다.

2003년 7월 사고 이후 경찰 수사 과정에서 작성된 현장 약도.

재심 재판 중에는 21년 만에 현장검증도 다시 진행된다. 이 사건 현장검증은 2003년 수사 과정에서 한 차례, 재판 과정에서 한 차례 등 총 두 차례 진행됐다. 과거 수사 기록을 보면, 당시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장씨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하며 그가 사고 직전 화물차 운전대를 의도적으로 좌측으로 틀어 저수지에 추락시켰다고 주장했다. 운전대 좌 조향 행동이 ‘살인의 고의’를 뒷받침한다는 뜻이었다. 반면 재심 청구인 장씨 측은 화물차 추락 직전까지 장씨가 달리고 있던 도로는 긴 직진도로라, 오히려 운전대를 좌측으로 조작하지 않고 그대로 직진해야 추락 지점에 닿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장씨가 줄곧 강조해오던 “추락 사고 당시 졸음운전을 했다”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과거 수사 기록 속 현장검증 후 그려진 약도를 보면, 당시 검찰과 법원은 직진도로가 우측으로 굽기 시작한 곳에서부터 검증했다. 이 지점에서는 핸들을 좌측으로 꺾지 않으면 화물차 추락 지점에 닿지 못한다. 장씨 측은 당시 화물차를 긴 직진도로를 따라 운행한 만큼 직선 구간에서부터 검증하는 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라고도 주장한다.

다음 공판기일은 5월22일이다. 장씨 부부가 타고 있던 화물차 추락 직후 구조 및 차량 인양 등에 투입된 민간 잠수부 등이 증인으로 출석한다. 현장검증은 6월3일이다.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이 진도 사건 현장에 직접 방문해 검증하기로 했다.

문상현 기자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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