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내내 승려 걷는 모습만...전주영화제서 연일 매진인 이유

백수진 기자 2024. 5.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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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 느린 걸음으로… 차이밍량 감독 ‘행자 연작’
미국 워싱턴 DC의 국립수목원, 붉은 승복을 입은 승려(리캉성)가 과거 미국 국회의사당의 일부였던 기둥들 앞을 천천히 지나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가 한창인 4일 전주 완산구 영화의 거리. 20여 명의 시민이 0.1배속으로 재생한 듯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걷는 사람, 중얼거리며 걷는 사람, 붉은 실로 몸을 연결해 함께 걷는 사람 등 자기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누가 조용히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200여 명의 관중도 숨을 죽이고 한 발짝 한 발짝을 지켜봤다.

4일 전주 영화의 거리에서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 참가자들이 배우 리캉성을 따라 느리게 걷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열린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대만 감독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행자 연작’은 붉은 승복을 입은 승려(리캉성)가 타이베이·홍콩·파리·도쿄·워싱턴 DC등 세계 곳곳의 도시를 느리게 걷는 영화들의 모음이다. 2012년 ‘무색(無色)’을 시작으로 10년간 총 열 편의 작품을 남겼다. 열 번째 작품 ‘무소주(無所住)’는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됐다.

대사도 사건도 없이, 극단적으로 느린 실험 영화인데도 ‘행자 연작’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영화도 2배속으로 보는 시대에 1시간 동안 걷기만 하는 승려를 보기 위해 예매 전쟁이 벌어졌다. 차이밍량 감독은 3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관객은 이미 수많은 영화를 봤고, 싫증이 난 상태다. 그들이 이제껏 봤던 영화와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에 참석한 차이밍량 감독은 “마음을 내려놓고 걷는 것이 비결”이라면서 “나의 영혼이 돌아올 수 있도록, 머리를 비우는 순간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연합뉴스

차이밍량은 ‘애정만세’ ’하류’ 등 모든 장편 영화가 세계 3대 영화제에 초청받은 대만의 거장 감독이다. 그는 ‘떠돌이 개’(2013)로 베네치아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고, 더는 상업적인 제작·배급 시스템 안에서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차이밍량 감독은 “창작의 제한을 많이 받았고, 그에 맞춰서 시나리오를 쓸 수가 없었다. 상업적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행자 연작’은 중국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삼장법사가 불경을 가지러 서역으로 떠나고, 온갖 고난을 겪게 되는 이야기. 승려 역할을 맡은 배우 리캉성도 “육체적인 고통이 컸다”고 털어놨다. 영하의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철판 위, 영상 40도의 찜통 같은 날씨에도 물집이 발바닥을 뒤덮을 때까지 맨발로 걷고 또 걸었다. 리캉성은 “프랑스 마르세유에선 구걸하는 줄 알고 마음씨 좋은 아줌마가 5유로를 쥐여준 적도 있다”며 웃었다. “서유기 속 삼장법사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끝까지 나아가는 삼장법사의 정신을 떠올리면서 걸었다.”

차이밍량 '무소주' /전주국제영화제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와 극단적으로 느리게 걸어가는 승려가 대비된다. 차이밍량은 자신의 영화를 미술관의 작품에 비유했다. “미술관에선 하나의 작품 앞에서 한 시간 이상을 서 있기도 하지 않나. 제 영화도 그렇다. 보다가 졸리면 자도 된다. 누가 영화관에서 자지 말라고 했나(웃음).” 그의 말처럼 ‘행자 연작’은 뉴욕현대미술관(MoMA), 파리 퐁피두센터 등에서도 상영됐다. 그는 “미술관을 통해 새로운 관객을 양성한다”고 표현했다. “한 명의 관객을 양성하는 건, 한 명의 훌륭한 예술가를 키우는 일과 같다. 돈만 벌려면 신경 쓸 필요도 없겠지만, 저는 제 영화를 보는 한 명 한 명의 관객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행자 연작’의 열한 번째 작품은 한국 전주에서 찍을 계획이다. 차이밍량 감독은 “어떻게 찍을지 아직은 모르지만, 많은 시간을 할애해 전주를 둘러볼 것”이라고 했다. “벌써 열 편을 찍었지만, 찍을 때마다 ‘내가 모르는 게 너무나 많구나!‘ 느낀다. 행자는 어느 곳을 가든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차이밍량

말레이시아계 대만인으로 1992년 영화 ‘청소년 나타’로 데뷔, ‘애정만세’(1994)로 베네치아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연출한 모든 장편 영화가 세계 3대 영화제에 초청됐다. ‘떠돌이 개’(2013)로 베네치아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뒤, 상업 영화 시스템에서 벗어난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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