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조차 말 아꼈던 독립운동…벼루에 스민 대쪽같은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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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은 3·1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지역이다.
3·1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면 마을의 유지로 평탄한 삶을 살았을테지만, 원산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고향을 떠나 강릉 주문진으로 이사했다.
단지 모친(최금철)으로부터 3·1운동 무렵 방 안에 보따리를 만들어놨다가 저녁만 되면 어느새 부친이 갖고나갔다는 목격담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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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뒤늦게 건국훈장 추서
아들 두영씨 부친유품 19점 기증
양양은 3·1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지역이다. 강현면·도천면 1200~1300여명은 1919년 4월 5~6일 만세시위를 벌이며 일본군인들을 뚫고 읍내로 행진하고 경찰주재소로 몰려가 사죄를 받아내는 활약을 펼쳤다.
박봉래 독립유공자(1894~1980)는 당시 25세로 강현면 회룡리 구장으로 있으면서 이 만세시위를 주도해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징역 1년 4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면 마을의 유지로 평탄한 삶을 살았을테지만, 원산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고향을 떠나 강릉 주문진으로 이사했다. 논밭을 일구며 살던 주문진에서 내내 그 집을 지키며 살고있는 박두영씨(83)는 최근 부친의 유품 19점을 강원광복기념관에 기증 기탁했다.
몸체와 뚜껑에 포도잎사귀가 조각된 벼루, 더 작은 휴대용 벼루, 한문 필사집 ‘장편’, 애독서 ‘통감’, 역법서, 저울, 사진 등 19점이다. 독립운동을 입증하는 사료는 아니지만, 몽당 먹은 어제까지도 벼루에 갈았을 것 같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삶의 체취를 알린다. 박두영씨는 부친은 걸음이 매우 빨랐던데다가 ‘꼬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쪽같은 성품이었으나 연초가 되면 역법서를 놓고 일일이 이웃 신년운세를 봐주는 인자함이 있었다고 추억했다.
또한 부친이 생전에 가족에게 독립운동 공적을 자랑한 적이 없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시기가 늦었다고 들려줬다.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독립운동이었는지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단지 모친(최금철)으로부터 3·1운동 무렵 방 안에 보따리를 만들어놨다가 저녁만 되면 어느새 부친이 갖고나갔다는 목격담만 들었다. 부친 사후에 양양의 지인으로부터 서훈 신청하라는 편지를 받고 뒤늦게 서류 작업에 나서 1998년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박씨는 “강원광복기념관에 부친의 유품을 기증하면 오랫동안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을 것 같아 결정하게 됐다”라며 “1970년대 모처럼 친척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가 창덕궁에서 찍은 흑백 사진은 전시후 꼭 되돌려받고 싶다”라며 그리움을 내비쳤다.
박미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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