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광 그 후 - 다시 찾은 미래] 6. 장성광업소 지킨 마지막 광부 3형제 ①

오세현 2024. 5. 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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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막장 공포 핏줄로 버틴 삼형제 “마지막 광부 시원섭섭”
IMF 직후 먹고 살기 위해 탄광으로
아버지 이어 3형제 모두 광부의 길
지하 속 머리 위에 달린 불빛에만 의지
매일 위험천만…어머니도 걱정 세 배
한 막장서 나란히 근무 ‘든든한 버팀목’
형제 부상 소식에 매번 노심초사
폐광 앞두고 시원함 반 아쉬움 반

셋이 모여 “마지막 광부가 되자”고 외쳤는데, 정말 마지막 광부가 됐다. 셋이 한 막장에서 일했으니 위험도 세 배, 가슴 쓸어내린 날도 남들 보다 세 배는 더 많았던 지난날이었다. 돌이켜보면 하루도 위험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막상 폐광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지금 속시원함 반, 아쉬움 반이다. 3형제가 모두 장성광업소에서 일하고 있는 김영구(53)·김석규(52)·김영문(47)씨 얘기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한 막장에서 일을 했다. 영구씨와 영문씨는 지난 4월 마지막까지 채굴작업을 했고 석규씨는 막장에서 일하다 목숨을 위협하는 사고를 겪은 뒤 트라우마로 3년 전부터 장비를 보수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 광부 3형제 중 막내 김영문(사진 왼쪽)씨가 막장 안에서 동료들과 작업 논의를 하고 있다.사진출처=영화제작사 상구네 영상 캡쳐. 김영문씨 제공

■ 광부 3형제의 탄생

광부의 삶을 원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IMF로 일하던 직장에서 급여가 밀리기 시작했다. 한 가정의 가장은 마음이 조급했다. 갈 곳 없는 이들을 받아줄 곳은 고향밖에 없었다. 김영구씨는 그렇게 탄광의 문을 두드렸다. 그때가 1998년쯤이다.

김영구씨는 “IMF가 시작됐고 임금이 체불돼 설 쇠러 왔다가 눌러앉게 됐다”며 “탄광 일이 위험해도 처우도 괜찮았고 그 당시로서는 먹고 사는 게 급해 이것저것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고 했다.

IMF 직후 탄광에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들 중에는 대학 졸업자들도 포함됐다. 영구씨는 “IMF 터지고 2년 지나니까 광부들이 몰리기 시작했다”며 “전단지 보고도 오기도 했고 먹고 살 게 없으니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도 같이 입사 했었다. 흔히 말하는 명문대 출신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영구씨가 동생들을 불러모았고 마침 다른 직장을 알아보던 석규·영문씨도 광부의 길로 들어섰다. 석규씨는 “김해에서 생활을 하다가 다른 직장을 알아보던 중에 광업소에 서류를 낸 게 돼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고 했다. 다른 광산에서 일하던 이들은 2001년 나란히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했다. 이들 입사 이후 3형제가 한 막장에서 일한 경우는 이들 뿐이다.

딱히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아 제안했지만 험한 일을 해야 하는 동생들을 바라보는 형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특히 막내 영문씨가 버텨낼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지금도 영구씨는 영문씨를 향해 “우리 보리밥 먹고 클 때 얘는 쌀밥 먹고 큰 애”라고 한다. 영구씨는 “내가 (탄광으로)불렀지만 과연 막내가 할 수 있겠나 싶었다”고 했다.

영문씨 역시 초창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버티겠나. 얼마나 다니겠나’ 였다. 탄광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00㎏에 이르던 몸무게가 입사 두 달만에 74㎏가 됐다. 영문씨는 “막내다 보니 형들이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많이 했다”며 “지하로 내려가면 굴이 미로처럼 나눠져 있기 때문에 의지할 수 있는 건 내 머리 위에 달린 불빛 하나다. 길이라도 잃으면 거기서 뱅뱅 돌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찾아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입사 초창기 앞 사람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 대를 이은 광부

사실 이들 형제에게 탄광, 광부는 익숙하다. 이들의 부친도 광부였기 때문이다. 낯설지 않아 이 길에 뛰어든 것도 있었지만, 그 삶이 어떤지를 너무나 잘 알았기에 외면하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다. 김영문씨는 “처음에는 광업소 들어오기 싫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본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란다. 그는 “친구 아버님도 돌아가셨고, 크게 다치는 건 다반사였다. 3교대를 하다보니 가정이 제대로 꾸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엄마들이 애들을 집에 두고 야반도주를 하기도 했다. 오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받아줄 곳은 고향 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들 형제의 아버지도 광부로 일했을 적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영문씨가 4~5살 됐을 무렵, 광부들을 실은 출근버스가 산에서 굴렀다. 타고 있던 이들은 거의 다 사망했고 3형제 아버지를 비롯해 한, 두 명만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아버지 얼굴을 알아보지 못 할 정도로 부상이 컸다. 이가 다 빠져 아버지는 그 사고 이후 이 전체를 금으로 다시 해야 했다.

남편의 힘든 삶을 지켜봤던 어머니였기에 3형제가 광산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석규씨는 “직장을 구하기 힘든 때였으니까 (어머니가)만류를 하지는 않았지만 위험하니 걱정은 많이 하셨다”며 “늘 위험한 곳에 들어가야 하니 그 부분이 걸리셨던 것 같다”고 했다.

영구씨는 “어머니가 안 좋아했다”며 “우리 어릴 때보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사망하고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싫어했다. 하지만 전 회사에서 임금이 밀리니 생활이 안 되고 먹고 살겠다고 선택했으니 붙잡지는 못하셨던 것 같다”고 했다.

대를 이은 광부는 장성광업소에서 비교적 흔하다. 영문씨는 “지금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가 광부인 이들이 적지 않다”며 “태백에서 자식들 공부시켜야 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또 처우도 괜찮았기 때문에 광부의 자식들이 대를 잇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 2001년 입사 후 장성광업소를 지킨 3형제. 사진 왼쪽부터 김영문·석규·영구씨. IMF 이후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영구씨가 동생들을 탄광으로 불러모으면서 광부 3형제가 탄생하게 됐다.

■ 걱정도·근심도 세 배

3형제가 나란히 한 막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하루종일 마음을 졸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탄광은 주로 3교대 체제다. 같이 투입 되는 경우도 있지만 각각 다른 조에 소속돼 있을 때는 일을 하면서도 늘 형, 동생 생각을 놓지 않는다.

영구씨는 “막장마다 성질이 다 다르다”며 “탄을 많이 캐면 메탄가스가 유독 더 나온다던가 일을 하는데 물이 떨어지면 언제 죽탄이 밀릴지 모르니까 항상 신경을 써야 한다”며 “괜찮은지 서로 물어보고 ‘어디 어디가 위험하니까 그런 곳은 조심하라’고 형제들 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 항상 알려준다. 나가면서, 들어가면서 서로 화이팅(응원) 해야 한다”고 했다. 막내 영문씨에게 형 영구·석규씨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영문씨는 “셋이 같은 일을 하고 있고 또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게 의지가 많이 된다”며 “문제가 생기면 서로 도와서 처리하고 막장에서 다툼이 일어날 때도 서로 조율하면 꼼짝도 못한다”고 웃어보였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막장 안에서 이들 형제의 부상 소식은 알리지 않는게 불문율이다.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영구씨는 “‘동생들이 다쳐서 (밖으로)나갔다’고 하면 일 끝날 때까지 얘기를 안해준다”며 “내가 소식을 들으면 일이고 뭐고 내팽겨치고 나가야 되니까. 그러면 서로 더 다칠 수 있다.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지만 그래도 ‘사고났다, 다쳤다’ 하면 가슴이 철렁할 때가 많다”고 했다. 3형제의 지난 20여 년은 이렇게 흘러갔다.

오세현·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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