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신냉전의 최전선으로 만들지 말아야 [왜냐면]

한겨레 2024. 5. 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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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지난해 11월8일 도네츠크 전선에서 러시아군 진영을 향해 박격포를 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석배 | 전 주러시아 대사

반년 가까이 표류를 거듭해 온 610억달러 규모의 우크라이나 군사지원 예산안이 미 상·하원을 통과, 조만간 지원이 이루어질 태세이다. 러시아군의 파상 공세로 수세에 몰린 우크라이나군이 버티는 데는 도움이 되겠으나, 전세를 뒤집을 만한 해결책은 될 수 없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최근 러시아군의 약진에도 불구, 양국 군 모두 획기적인 승기를 잡지 못하는 가운데 협상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 상황이 지속하고 있다.

장기전에 대한 러시아의 낙관론을 꺾기 위한 서방의 군사 지원이 지속하는 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협상보다는 전쟁의 지속을 선택해 나갈 것이다.

또한 러시아와의 불화로 국경이 항시 불안한 우크라이나에 대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등이 안전 보장에 대해 적극적일 수 없다는 것도 협상을 어렵게 하는 요소다.

더욱이 양국 지도부가 정치적 파멸을 각오하지 않고는 영토문제를 양보할 수 없다는 점도 전쟁의 장기화를 예고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한러관계는 앞으로도 격랑을 거듭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미국과 나토 등과 공조해 나가면서 동시에 한러관계를 관리하는 것은 마치 자갈길을 달리는 차 속에서 바늘에 실을 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윤석열 정부는 확장 억제를 골자로 한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일 공조라는 외교적 성과와 함께 나토+‘아시아·태평양 파트너국’(AP4·에이피4, 한국·일본·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에 적극 참여하는 등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책임 있는 중견국임을 확고히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모든 외교적 성과는 그 성공 속에 미래 문제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는 제임스 베이커 전 미 국무장관의 지적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대한민국 외교가 직면한 현실이다. 러시아와 북한 간 군사적 밀착은 북한으로부터의 무기 지원이 절실한 러시아의 고단한 사정이 추동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미국이 ‘미국·영국·호주 군사동맹’(AUKUS)과 ‘미국·일본·인도·오스트레일리아 4자 협의체’(Quad) 및 나토+에이피4 등을 주도하면서 아태지역에서 새로운 안보 블록을 구축하고 있다고 의심해 온 러시아로서는 북한과 군사협력을 통해 미국의 확장 전략을 단속하겠다는 측면도 있음을 간과하기 어렵다.

더욱이 지난 4월 미·일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의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구조가 진화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우리로서는 이 과정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에 대한 미국의 기대와 요구도 높아질 것이다. 북한이 여전히 ‘제1의 안보위협’인 우리의 현실과 북중러 공조를 경계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한미동맹 동력에 따른 주문을 따르기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남북한의 첨예한 대치가 지속하는 가운데 미국의 동맹구도 재편과 이에 대응하는 러시아의 거친 행보를 보면 인도·태평양 신냉전의 경계가 한반도에 그어질 가능성이 우려된다. 1990년 독일 통일과 함께 나토의 동진으로 유럽의 경계는 독일에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이동했다. 나토와 러시아 간 경계에 위치하게 된 우크라이나가 참혹한 일을 겪고 있음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한미일 공조를 공고히 하면서 동시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지혜롭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 내부에서는 러시아와 북한 간 밀착과 특히 지난 3월 러시아가 유엔 대북제재위원회 산하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대 러시아 강경 기류가 힘을 얻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제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살상 무기 지원을 망설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러시아에 대한 선동적 기류는 그간 우리가 미국과 나토 등 서방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유지하는 등 한러관계 관리를 위해 상당한 의지를 보였음에도 러시아가 이에 부응하기보다는 우리의 인내를 지속하여 시험하고 있다는 인식의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살상 무기를 지원하거나 그러한 의향을 러시아 쪽에 시사하는 이유는 러시아의 행보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강공으로 나가면 러시아가 행보에 변화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는 허망하며 위험하기조차 하다. 우리가 강경으로 전환할 경우, 러시아는 행보에 변화를 주기보다는 매우 거칠게 이를 거스르려 할 것이다. 외교적 노력을 소진하지 않은 가운데 섣불리 강경 카드를 꺼내 들 일은 아니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할 수 있는 실효적 조치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그 방안은 모스크바가 아닌 워싱턴에 있을 수 있다. 세계 전략 구도를 보는 미국과 우리가 느끼는 한반도 긴장의 밀도에 대한 질감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세계 전략 속에 자칫하면 실종될 수 있는 우리의 절박한 안보 현실에 대해 미국의 이해를 높이는 한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확보한 여지만큼이 우리가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해 나가는 데 있어 운영할 수 있는 외교 공간일 것이다.

우리는 매우 복잡한 고차 외교 방정식을 인수분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있다. ‘비스마르크처럼 다섯 개의 공을 공중에서 돌릴 수 있는 저글링 재주가 없던’ 레오 본 카프리비 수상은 결국 독일을 1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으로 이끌었다. 우리 외교당국이 고도의 외교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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