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서브, 욕망의 스매싱…테니스가 이렇게 격렬하고 뜨거웠나

2024. 5. 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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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스'
루카 과다니노 감독 신작
테니스 선수들의 삼각관계
금기 넘나드는 인간의 본능
젠데이아 콜먼 등 연기 돋보여
영화 ‘챌린저스’는 18세 때 처음 만난 세 테니스 선수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다. WBD 제공


루카 과다니노 감독의 신작 ‘챌린저스’는 영화가 지닌 속성 중 하나인 비현실성의 현실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이건 그냥 영화일 뿐이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반대임을 깨닫는다. 아닌 척하지만, 사실은 주변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된다.

과다니노 감독은 현실과 비현실의 간극을 얄미우리만큼 잘 파고들어 가는 인물이다.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중년 여자의 얘기를 그리거나(아이 엠 러브) 예전 연인을 죽이는 방식으로 관계를 정리하는가 하면(비거 스플래쉬) 잘생긴 청년에게 빠진 어린 남자의 사랑을 아이의 시선으로 그린다(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다 실제로 많이 벌어지는 일들이다. 어쩌면 우리가 그렇다고 인정하거나 그걸 표현하기를 금기시하고 있을 뿐이다.

‘챌린저스’는 기본적으로는 테니스 영화다. 주인공 셋은 테니스 선수다. 테니스 천재 타시 덩컨(젠데이아 콜먼)은 미국 전국 청소년 경기에서 우승하고 그 뒤풀이 파티에서 아트 도널드슨(마이크 파이스트)과 패트릭 즈바이그(조시 오코너)를 만난다. 아트와 패트릭은 어릴 때부터 기숙사 방을 같이 쓴 죽마고우다. 패트릭은 약간 상남자 스타일을 지향하고, 아트는 연약하고 섬세한 스타일이다. 타시는 둘 다에게 흥미와 욕망을 느낀다. 모두 열여덟 살 때의 이야기다. 셋의 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타시는 패트릭과 아트에게 자신의 번호를 따고 싶으면 시합에서 이기라고 한다. 이기는 사람이 자신을 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건 13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챌린저스 게임 결승에 붙은 패트릭과 아트는, 이긴 자가 타시를 가질 수 있음을 암시받는다.

세월이 지나 아트는 유명한 선수가 되고, 타시는 그의 코치가 된다. 타시는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좌절의 순간을 패트릭은 같이하지 못했고, 아트는 곁을 지켰다. 그래서 타시는 아트와 결혼해 아이도 낳았지만, 남편의 슬럼프에 슬슬 짜증을 내고 있는 상태다.

테니스를 소재로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랑이 얼마나 예민하고 강렬하고, 뾰족한 것인지를 쉬지 않고 말한다. 지금의 타시는 남편 아트의 속마음을 안다. 그가 여전히 패트릭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산다는 것을 안다. 그게 다 자신이 처음에 아트가 아니라 패트릭을 선택한 것 때문이며, 자신이 다치기 직전 패트릭과 대판 싸우지 않았다면-그런 우연이 없었다면-아트와의 삶 또한 없었을 것이라는 걸 ‘아트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잡한 감정의 순환을, 저 멀리 있는 패트릭 또한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욕망하되 욕망하지 않는 척해야 하는, 우리 본능 속 삼각관계에 관한 욕망과 복수의 소유욕, 그리고 사랑의 본성을 다룬다는 얘기다.

테니스는 유례없이 격렬하고 뜨거운 경기다. 사랑이 그렇다. 인간은 뼛속 깊이 자유롭게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 대신 뼛속 깊이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면 된다. 영화가 대신 해준다. 그런 점에서 ‘챌린저스’는 우리 속에 갇혀 있는 영혼의 욕망을 깨우는 영화다.

테니스 선수들의 이야기인 만큼 모두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한다. 특히 젠데이아 콜먼의 검은빛 피부의 늘씬한 외모는 ‘섹스 어필’이란 단어를 새삼 꺼내 들게 만든다. 그들은 경기를 하면서 땀을 비 오듯 흘리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둘이서 혹은 셋이서 뜨거운 관계를 맺는 장면이 연상된다. 영화 제목은 윔블던이나 US오픈 같은 메이저리그 경기가 아니라, 거기 나갈 수 있는 출전 자격이 걸린 경기에서 따왔다.

타시와 패트릭, 아트는 서로 듀스에 듀스를 거듭하는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서브 하나로 지금까지의 모든 경기를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 있다. 자, 둘은, 아니 셋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타시의 포효 아닌 포효는 남편을 응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옛 남자에게 돌아가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제 둘 다 가질 수 있음을 기뻐하는 것인가.

이 영화의 음악은 최근 몇 년 새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버전으로서 최고급이다. 심장을 꽝꽝 울린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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