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 같은 공연장 실망"…클래식에 유머 입힌 피아니스트 주형기

이강은 2024. 5. 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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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영국인 피아니스트 주형기, 명문 음악학교 출신에 다재다능 음악가
20년 전 친구 바이올리니스트 이구데스만과 손잡고 클래식에 코미디 접목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가족 음악회’ 위해 6년 만의 내한 공연
지난 4일 ‘가족음악회:유머레스크’ 공연 내내 어린이 등 많은 관객 환호하며 즐겨
피아노 아래 바닥에서 잠자는 척하다 누워서 연주, 라흐마니노프 곡 연주할 땐 노래하다 통곡
“20년 전엔 ‘도대체 이게 뭐냐’는 반응, 지금은 공룡 같은 클래식계도 꿈쩍”
“웃음과 유머로 클래식 장벽 낮추고 클래식이 젊은 층에 다가갈 수 있는 공연 할 것”
기돈 크레머,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엠마누엘 액스, 빌리 조엘 등 세계적 아티스트도 협업
“음악성과 진정성을 먼저 인정받았기 때문에 우리 공연 지지 받는 것”
올해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SSF)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로 ‘가족음악회: 유머레스크’ 공연이 열린 지난 4일 저녁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유머레스크는 유머러스하고 분위기가 변덕스러운 성격의 가벼운 기악곡 등을 의미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인사동 한 호텔 연습실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주형기가 자신의 음악세계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때론 숨죽이며 관람해야 할 정도로 엄숙한 편인 여느 클래식 연주회와 달리 공연 도중 객석에서 박수와 웃음소리가 이어졌고, 반응 속도가 빠른 초등학생 어린이 관객도 많았다. 클래식 음악을 주재료로 쓴 근사한 코미디 쇼를 보는 듯했다. 이 무대를 이끈 주인공은 한국계 영국인 피아니스트 주형기(51)다. 작곡과 편곡, 지휘 등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그는 러시아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세이 이구데스만과 2004년 시작한 코믹 클래식 듀오 ‘이구데스만과 주(igudesman & joo)’ 공연으로 유명하다. 둘은 영국 명문 예후디 메뉴인 음악학교 동기생이다.

6년 전 내한 공연 때와 달리 올해는 주형기 혼자 한국을 찾아 이번 무대를 꾸몄다.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SSF 예술감독), 한수진, 대니 구와 비올리스트 김상진 등이 단짝의 빈자리를 거뜬히 메웠다.

어눌한 한국말로 진행자도 겸한 주형기의 기발한 연주와 익살은 공연장을 여러 차례 들었다 놓았다.
지난 4일 저녁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가족음악회: 유머레스크’ 공연 도중 주형기가 동료 피아니스트 무히딘 뒤뤼올루(오른쪽) 연주하다 무대 바닥에 구르는 모습.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연주하던 중 같은 음을 줄기차게 반복하다 지루한 듯 바닥에 누워 코까지 골며 자기도(잠든 척하기도) 했다. 다시 일어날 때 머리가 피아노에 부딪혀 관객 웃음을 자아내더니 곧장 누운 상태로 손만 피아노 건반에 올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를 연주했다. 객석에선 박수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았다는 베토벤처럼 명상을 하다 팔꿈치와 손날로 연주하기, 신용카드 삽입을 해야 건반 덮개가 열리는 피아노 치기 등 한 편의 소극 같은 장면이 이어졌다.

특히 모든 출연자와 함께한 마지막 곡(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 연주가 백미였다. 주형기가 갑자기 노래 ‘올 바이 마이셀프’를 부르며 통곡하자 다른 연주자도 덩달아 우는 연기를 각양각색으로 하면서 객석을 뒤집어 놓았다. 이날 클래식 공연장에서 맛보기 쉽지 않은 유쾌한 음악회를 즐긴 관객들은 뜨거운 갈채로 화답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호텔에서 세계일보와 만난 주형기가 “웃음과 코미디는 아주 깊은 감정까지 담을 수 있는 좋은 도구”라며 “음악과 유머는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한 말이 와닿은 순간이다. 8살 넘어 피아노를 시작했지만 전설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1916∼1999)이 80살 생일 공연에 부를 만큼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는 학창 시절부터 클래식에 코미디를 접목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클래식 공연장에 갔는데 관객들은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는 것 같고, 연주자들은 관객에 무신경한 모습이 마치 장례식장에 와 있는 느낌이었어요.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한다고 자부한 제가 그 정도인데 일반 관객은 오죽하겠습니까.”
지난 4일 ‘가족음악회: 유머레스크’ 공연 도중 주형기가 피아노 아래 누워 자는 척하며 한 손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주형기는 예전엔 공연장이 자유롭고 열린 분위기였다고 했다. 리사이틀을 창시한 리스트는 연주 도중 관객들과 와인을 마시고, 모차르트는 16마디 만에 박수가 나오자 연주를 멈출 만큼 좋아했다는 것이다. 또 베토벤 시대엔 바이올린을 뒤집어 연주하기도 했고, 마지막 악장 연주 때 연주자들이 차례로 퇴장하는 하이든 교향곡 45번 ‘고별’은 하이든이 휴가를 보내주지 않는 고용주(귀족)에 대한 불만을 재치 있게 담아낸 곡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렇게 20년 전 의기투합한 이구데스만과 첫선을 보인 ‘악몽 같은 음악(A Little Nightmare Music)’ 제목의 공연은 클래식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처음엔 ‘도대체 이게 뭐냐’는 반응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공룡 같은 클래식계도 꿈쩍하고 있어요. (오스트리아) 빈의 세계적인 공연장에서 음악과 코미디 시리즈가 빠지지 않습니다. 웃음과 유머로 클래식 장벽을 낮추고 클래식이 젊은 층에 다가갈 수 있는 공연을 계속하고 싶어요.”
지난 4일 ‘가족음악회: 유머레스크’ 공연 도중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오른쪽)가 비올리스트 신연 황의 새 연주 기록 도전에 대한 설명을 하는 사이 신연 황이 뒤에서 몸 풀기 운동하는 모습으로 관객 웃음을 자아내고 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주형기가 지난 4일 ‘가족음악회: 유머레스크’ 공연에서 찬조 출연해준 동료 음악가들과 함께 마지막 곡으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2악장을 연주하던 중 ‘올 바이 마이셀프’를 부르며 통곡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 피아니스트 무히딘 뒤뤼올루는 무대 앞까지 나와 따라 우는 연기를 하고,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가운데 줄 왼쪽부터), 한수진, 대니 구, 비올리스트 김상진, 첼리스트 마리 할링크도 곧 각자 우는 표정으로 연주했다.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 제공
주형기와 이구데스만의 연주회가 단순히 ‘웃기고 재미난 공연’으로 소비되지 않는 건 음악을 대하는 자세에 있다. 그는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진지하고 심각한 곡이든 가볍고 유머러스한 곡이든 같은 비중으로 최선을 다해 작곡했다”며 “우리도 음악성과 진정성이 먼저 인정받았기 때문에 공연도 지지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 요요마,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액스, 팝가수 빌리 조엘 등 주형기와 협업한 유명 음악인이 많다. 
이튿날 SSF 폐막 무대에도 오른 주형기는 실내악 예찬론자다. “혼자 연주할 땐 독재자처럼 모든 걸 제어할 수 있지만 실내악에선 싸우게 될지라도 서로의 음악을 들으며 대화를 해야 합니다. 실내악을 통해 연주자는 물론 청중도 대화와 경청을 배울 수 있어요. 세상도 서로 생각이 같을 필요는 없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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