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없이 혐오 쏟아내는 '밥 먹는 기계'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5. 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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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19편
SF 대가 필립 K. 딕의 텍스트
할리우드가 사랑한 SF 작가
인간 정체성 혼란 잘 드러내
고독하고 절박했던 거장의 삶
유명세와 달리 굴곡 많은 생애
인간의온기 갈구하며 명작 집필

# 블레이드 러너, 토탈리콜, 마이너리티 리포트…. 영화 팬들이 사랑하는 이 SF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영화들이 바로 필립 K. 딕이 쓴 SF 소설이란 점이다. SF 작가 필립 K.딕의 수많은 소설은 영화와 게임 등 수많은 매체로 재탄생하며 사랑을 받았다.

# 하지만 원작자인 필립 K. 딕의 인생은 순탄치 못했다. 그의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짙게 깔린 인류의 불안에서 탄생했고, 그는 평생 불안증을 해소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으로 인류의 불안은 깊어졌고 1950~1960년대 문학작품은 이런 불안에서 탄생했다.[사진=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 시대가 열리자 인류의 불안은 깊어졌다. 핵전쟁의 위협과 과학기술을 향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1950~1960년대 문학 작품의 상당수는 이 불안감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인류 미래와 절멸을 다룬 이 시기의 작품이 묘사한 풍경들은 오늘날 점차 현실로 변하고 있다.

이 시기의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가운데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1982년)'다. 미래 사회의 인류는 복제인간(replicants)을 만들어 우주 공간에서 노동을 시킨다.

그러자 복제인간들은 인간을 위한 노동을 거부하고 지구로 잠입해 들어온다. 복제인간과 정상 인간을 구별해 내는 것이 직업인 주인공 '데커'는 복제인간을 제조한 회사의 협조를 얻어 지구에 잠입한 복제인간들을 찾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하지만 데커는 복제인간과 사랑에 빠지고, 복제인간의 인간적 감정을 조금씩 공감한다.

폴 버호벤 감독의 영화 '토탈리콜(1990년)'은 인간의 기억을 조작하려는 회사의 음모를 다룬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년)'에서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예지자들(Pre-Cogs)'이 등장한다.

예지자들은 미래에 일어날 범죄를 미리 계산하고 경고한다. '범죄 예방국'은 그들을 이용해 미래의 살인자를 검거한다. 그러나 범죄예방국의 리더 '앤더슨'은 예비 범죄자로 지목받아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범죄 예지를 악용하려는 권력의 음모와 마주한다.

그밖에도 2분 앞의 미래를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도박사가 등장하는 영화 '넥스트(2007년)', 완성품을 보고 역으로 제품의 원리와 설계를 파악해 다시 만들어내는 리버스 엔지니어(Reverse Engineer)가 등장하는 영화 '페이첵(2003년)'은 모두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설정과 비슷한 영화들이다.

워쇼스키 형제가 만든 역작 '매트릭스(1999년)'도 가상현실에 갇힌 인간을 다룬 작품인 '토탈리콜'의 영향을 받았다. 놀랍게도 언급한 작품들의 작가는 동일 인물이다. 그는 바로 천재 SF 작가 필립 K. 딕(1928~ 1982년)이다.

1928년, 필립 K. 딕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필립 킨드레드 딕'이라는 이름으로 쌍둥이 누이 제인 샬럿 딕과 함께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 에드거 딕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다. 어머니 도로시 킨드레드는 만성 신부전증을 앓고 있어 수유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아이들의 영양 부족으로 이어졌다.

불과 1년 후 쌍둥이 누이 제인이 사망했다. 이는 필립 K. 딕의 삶과 작품 세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자 딕은 어머니와 함께 캘리포니아주 버클리로 이사했다.

딕은 어린 시절 내내 몸이 허약했고 심각한 불안증을 앓았다. 딕의 유일한 취미는 공상과 글쓰기였다. 딕은 1947년 명문 버클리 대학에 진학했으나 불안증과 ROTC 훈련을 향한 거부감으로 두 달 만에 학업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떤 치료로도 딕의 불안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딕은 결혼해 가정을 꾸리려고 했지만, 이혼을 거듭했다.

딕은 불안증에 시달리면서 끊임없이 소설을 썼다. 마침내 그는 1951년 '더 매거진 오브 판타지 앤드 사이언스 픽션'에 단편 '루그'를 판매하며 데뷔했다. 하지만 당시 SF소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딕은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병사들이 복용했던 각성제 '암페타민'을 처방받았고, 그것을 평생 에너지원으로 삼았다.

1963년, 딕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한 미래를 다룬 가상 소설 「높은 성의 사나이」로 SF 문학계의 최고상인 '휴고상'을 받으면서 비로소 문단에서 인정받았다. 이 무렵 딕은 정오 무렵에 기상해서 타자기 앞에 앉은 다음날 새벽 2시까지 글을 썼다. 그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수십 편의 단편을 완성했다.

그러나 당시 비주류 취급을 받던 SF 소설의 원고료는 형편없이 낮았다. 중편소설 「마이너리티 리포트(1956년)」를 쓰고 딕이 받은 원고료는 고작 15달러 정도였다. 훗날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어 3억6000만 달러 이상의 흥행 기록을 세운 것에 비하면 정말 초라한 액수였다.

그럼에도 딕은 멈추지 않고 타자기를 두들겼다. 암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불안증, 각성제와 각종 약물의 후유증 탓에 딕은 자주 환각에 시달렸다. 딕의 소설의 기저에는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과연 현실인가' '내가 기억하는 것은 진짜인가'와 같은 질문이 깔려 있다.

그것은 환각과 불안을 견디면서 나온 고통스러운 질문이었다. 딕은 소설 속에서 로봇, 복제인간, 인공지능(AI)을 등장시켜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그를 위로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쓴 소설 속의 기계들이었다.

삶의 말미에 그는 짧게 빛을 봤다. 1968년에 출간한 장편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영화 제작사가 높은 가격(판권료)에 사들였던 거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금을 손에 쥔 딕은 영화 판권료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결국 딕은 영화 개봉을 보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쌍둥이 누이 제인의 곁에 묻혔다.

천재적인 상상력의 과실은 딕의 상속인들에게 돌아갔다. 딕이 사망한 후 할리우드는 그의 원작 소설을 연이어 영화로 제작했다. 딕에게 남은 것은 단지 이름뿐이었다. 딕이 사망한 후 그의 이름을 딴 '필립 K. 딕 SF 문학상'을 제정했고, 2007년에는 미국 문학 고전들을 엄선한 '라이브러리 오브 아메리카' 시리즈에 SF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뽑혔다.

딕의 소설 속에서 로봇, 복제인간, AI 같은 기계들은 모두 외로운 존재로 그려진다. 36편의 장편소설과 100편 이상의 단편을 남긴 딕이 갈구했던 것은 자신이 끝내 느끼지 못했던 인간의 온기였다.

"타인에게 공감하고, 다른 생명체에 동정심을 갖추는 능력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돌과 금속, 식물과 동물, 나아가 인조인간과 구분하는 유일한 것이다." 고통의 상상력으로 적은 딕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유일한 주제다.

인간이 서로의 온기를 잊을 때 인간은 그저 밥을 먹는 기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다른 관점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다른 진영을 혐오하며,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긴커녕 '쓸모없는 사람' 취급하는 게 일상화한 지금 높으신 양반들이, 아니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일침이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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