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간, 가장 오래된 금속 소재 산업…‘첨단기술의 원점’을 찾아서

한겨레 2024. 5. 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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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저자에게 듣는 경제와 책 | <대장간 이야기>

저자에게 듣는 경제와 책 | <대장간 이야기>
정진오 지음 | 교유서가 | 1만8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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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를 달궈 각종 철물을 만들어내는 대장간은 대량생산을 우선시하는 현대사회의 시스템과는 맞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전통 수공업의 대명사 격인 대장간은 어쩌면 경제원칙에는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적은 비용으로 큰 효과를 얻어야 하는 경제논리와 수없이 두드리고 달구는 과정을 거쳐야 좋은 물건을 생산해내는 대장간은 그 지향점부터 어긋나 있다.

그렇다면 대장간은 영영 사라져야만 하는가. 대장간은 인류가 개발해낸 온갖 기술의 원점(原點)과 같은 곳이다. 대장간은 인류가 불과 쇠를 다루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는 가장 오래된 금속 소재 산업체이자 살아 있는 기술 박물관이다. 대장간은 경제원칙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도 ‘살아 있는 기술 박물관’이라는 타이틀 하나만으로도 그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첨단무기, 첨단기술이라고 할 때의 ‘첨’(尖)이란 글자는 뾰족하다는 뜻으로도, 날카롭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뾰족하면서 단단한 창, 날카로우면서 무르지 않은 칼을 만들 줄 아는 곳이 바로 대장간이다. 이렇듯 대장간은 첨단기술의 원점 같은 곳이다. <대장간 이야기>에 ‘첨단기술의 원점을 찾아서’라는 부제를 붙인 이유다.

생생한 대장간의 현장

<대장간 이야기>는 우선 망치 소리가 들리는 듯 생생한 대장간의 현장을 보여준다. 문학, 신화, 그림, 영화, 음악, 역사, 철학, 지명 등 대장간과 그 속에서 땀 흘리는 대장장이의 면면이 녹아든 인문학적 바탕까지도 풍부하게 소개한다. 대장간을 소재로 백범 김구에게 다가가기도 하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과 함께 조총을 만들어낸 대장장이들을 호명하기도 한다. 임진왜란의 시작점이라 할 일본 조총의 발상지를 찾아가 그곳에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대장간의 흔적을 살피기도 한다. 이 책은 한마디로 ‘사라져가는 대장간의 현장과 그 인문학적 향기를 담아낸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자를 일러 엔지니어(engineer)라고 한다. 고대 로마에서는 성이나 요새를 부술 수 있는 공성(攻城) 무기를 엔진(engine)이라고 했다. 이 무기를 만들 줄 아는 기술자가 엔지니어다. 그 엔지니어들은 대장장이들이었다. 사람들의 생명줄을 지켜낼 대장장이는 그 옛날, 나라를 지키는 핵심계층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위정자와 기술자의 관계는 늘 갈등하기도 했고, 또한 협력하기도 했다. 협력할 때 나라가 발전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대장장이 출신으로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은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 대장장이였지만 기술력의 중요성을 정책에 반영할 줄 아는 세종대왕을 만나 조선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 수 있었다. 장영실은 물시계인 자격루와 천체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 그리고 이 둘을 합친 다목적 시계인 옥루를 발명했다. 세계 최초의 ‘다연장 로켓’으로 불리는 신기전(神機箭) 개발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그러나 양반 관료가 모든 걸 틀어쥔 조선 정치의 중심 무대에서 노비 출신 장영실의 활약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장영실의 퇴장 이후 조선의 과학기술도 더는 뻗어가지 못했다.

국내 마지막 대장간 거리 ‘도원동’

국내 마지막 대장간 거리가 인천 중구 도원동 대로변에 있다. 여기에는 대장간 3곳이 나란히 붙어 있다. 여기서 멀지 않은 숭의동 공구상가 주변에 1곳이 더 있다. 인천에는 우리나라 섬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장간(옹진군 영흥민속대장간)도 있다. 이렇게 5곳의 대장간은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 대장장이 혼자서 일한다. 대장간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 대장간은 언제 문 닫을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다.

대장간에서는 아직도 우리네 삶의 현장에서 쓰이는 연장을 만든다. 밭일에 주로 쓰이는 호미의 종류가 지역마다 다르다는 걸 영흥도 대장간에 가면 알 수 있다. 황해도 옹진 지역에서 쓰던 호미가 다르고 강화도에서 쓰는 호미가 다르다. 낙지를 잡는 삽이나 호미 같은 도구도 어느 지역의 갯벌이냐에 따라 그 모양이 다르다. 고려시대 바다에 침몰한 선박에서 나온 수산물 채취 도구와 비슷한 모양의 조새를 아직도 우리의 대장간에서는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2021년 12월, 오랜 역사와 바닷가 마을 고유의 공동체의식 등을 인정해 갯벌어로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우리의 대장간이 사라진다면 중국산 도구로 갯벌어로를 해야 하는 처지다. 반쪽 국가 문화재로 전락하는 거다. 그리되면 중국인이 김치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듯, 우리의 갯벌어로 문화 또한 중국에서 시작됐다고 억지를 부릴 게 자명하다. 우리 대장간은 문화재 보존 차원에서라도 지켜낼 필요가 있다.

정진오 전 인천시 대변인 solchil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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