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스폿] 국내 최초 리뷰! 스위스 2,860m 위 레스토랑

곽서희 기자 2024. 5. 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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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산기슭의 숨은 피난처, 레퓨지 레스파스(Refuge l’Espace)

해발 2,860m, 첩첩산중에서 발견한 기적 같은 피난처.

깊은 산 속 옹달샘

땅에 붙어 있을 땐 그렇게 평화롭더니, 산만 오르면 장르가 익스트림하게 변한다. 호흡은 가빠지고 풍경은 굴곡진다. 스위스는 그런 나라다.

여기는 해발고도 2,860m, 스위스 발레(Valais)주의 디아블러레(Diablerets) 산 정상 부근. 글래시어 3000(Glacier 3000) 스키장에서 빙하 하이킹 코스를 따라 1시간쯤 올랐을까. 6월인데 사방이 눈이고, 사방이 눈인데 땀이 흐른다. 여름에 설산에서 반팔 입고 눈 언덕을 오르며 땀을 닦는, 이런 요상한 아이러니는 스위스에선 일상이다.

우리가 정복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고 했던가. 뉴질랜드의 등산가 에드먼드 힐러리의 명언에도 불구하고, 운동 부족형 인간의 비루한 몸뚱이는 오늘도 하찮다. 정복이고 나발이고, 당장 죽을 것 같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 때문에 걷는 게 지상에서의 달리기보다 힘들다. 지구의 중력이 이렇게나 강력했나. 인간의 신체는 고도 3,000m 이상부터 약한 고산병을 겪는다. 대표적인 증상은 두통과 피로, 호흡곤란. 그러니까, 다섯 걸음마다 숨을 골라야 하는 지금의 상황은 단순 필자의 저질 체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변명 아닌 변명.

등산의 목표가 꼭 정상일 필요가 있나. 결과보단 과정이 중요한 거 아닌가. 헐떡이는 들숨과 날숨에 얄팍한 정신 승리를 거듭하고 있던 그때. 저 멀리, 회색 컨테이너 박스가 보인다. 깊은 산 속 옹달샘의 등장, 레퓨지 레스파스(Refuge l'Espace)다.

레퓨지 레스파스의 둔탁한 외관

일단 '히든 스폿' 코너명에 걸맞게 국내 최초 리뷰다. 레퓨지 레스파스는 디아블러레 산기슭에 위치한 레스토랑 겸 휴식처다. 어찌나 꽁꽁 숨어 있는지, 멀리서 보면 거의 공허 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막 속 오아시스, 바다의 등대. 길 잃은 자들에겐 지표이자 희망이 되어 줄, 그런 곳. 작은 실내 공간 하나에 손바닥만 한 테라스가 전부지만 지친 등산객들에겐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피난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픈 주방 너머로 냄비와 프라이팬이 불 위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 꼬릿한 냄새가 딱 치즈고, 구수한 냄새는 수프다. 서너 개의 테이블이 놓인 공간이 훈훈한 공기로 부푼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을 밟고 창가에 앉았다. 그리고 뒤따르는 비어 부부(Inge & Roland Beer)의 따뜻한 미소. "웰컴 투 아워 헤븐!"

메뉴판을 펼치니 진짜 여기가 천국인가 싶다. 각종 스위스산 치즈와 빵, 소시지, 따끈한 홈 메이드 수프, 트러플 오일과 해시 브라운을 곁들인 요리…. 지역 농산물로 만든, 너무나 범속해 좋은 음식들이다. 페퍼민트가 들어간 따끈한 스위스 티(Swiss Tea)와 핫초코, 디저트로 사과 파이와 초콜릿케이크까지 야무지게 시켰다. 원샷, 초토화, 5초 컷. 제아무리 평범한 음식이라도 해발 2,860m에서라면 초일류 오마카세가 되는 법이다.

중력이 너무 잘 느껴지는 해발 2,860m의 눈길

남은 치즈 조각까지 모조리 입에 털어 넣고 나니 그제서야 창문 너머 우뚝 솟은 바위 탑이 보인다. 높이 50m의 생 마틴 탑(Tour Saint-Martin), 별명은 '악마의 스키틀(Devil's Skittle)'. 얽혀 있는 전설이 독특하다. 이 산의 이름에 힌트가 있다. 디아블러레(Diablerets), 게임 <디아블로>의 그 디아블러가 맞다. 번역하면 악마란 뜻. 중세 시대부터 디아블러레 산 정상은 항상 위험하고 불길한 장소로 여겨져 왔다. 악마, 저주받은 자, 모든 사악한 요정들이 모이는 곳이었다고. 스키틀은 일종의 볼링 같은 게임인데, 악마들이 생 마틴 탑을 볼링핀 삼아 바위를 굴려대며 노는 탓에 산 아래 작은 마을 레 디아블러레(Les Diablerets)에 산사태가 자주 일어나는 거라고 사람들은 믿었단다. 실제로 18세기에 두 차례의 끔찍한 산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때 주민들 사이에서 바위를 굴리는 악마를 봤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이런 전설이 무색하게 지금의 레 디아블러레는 각종 어드벤처 스포츠 애호가들이 찾는 휴양지 마을이다. 두 번의 산사태는 데르본 강(Derbonne river)을 막아 데르보렁쓰(Derborence) 호수를 만들었고, 암석 잔해 위로는 원시림이 형성됐다. 덕분에 데르보렁쓰 호수는 지질학자와 식물학자들을 매료시키는 자연 보호 구역이 됐다.

레퓨지 레스파스의 테라스와 생 마틴 탑

그런데 사실, 생 마틴 탑은 이런 전설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탑은 곧 디아블러레 산맥의 최고봉에 올랐다는 표식이다. 아직 정상까진 멀었겠거니 했는데, 여기가 정상이라니. 이보다 더 기쁜 반전이 있을까. 악마든 스키틀이든, 등반이 곧 형벌인 여행객에겐 이런 천사 같은 존재가 없다.

테라스에서 펼쳐지는 베른 알프스 산맥의 풍경

땀으로 흠뻑 젖었던 티셔츠 사이로 단순하고 깨끗한 바람이 불었다. 테라스로 나가니 데르보렁쓰 호수와 베른 알프스(Bernese Alps) 산맥이 발아래 지도처럼 깔린다. 내가 창조한 세상도 아니건만 조물주의 뿌듯한 마음을 알 것만 같다. 고지대에서 본 파랑은 맑고 우아했고, 초록은 짙고 무거웠다. 굽이굽이 퍼진 물의 지류가 여러 줄기로 뻗어 가고, 수령 600년에 이르는 고목들의 정력이 숲을 이뤄 호수를 둘러쌌다. 수염 독수리가 머리 위를 맴도는 동안, 안개 같은 구름은 장막을 접었다 폈다 하듯 산맥을 드러냈다 감췄다. 시간의 세례에도 풍화되지 않을, 지극히 스위스다운 풍경이었다. 푸르고 풍요로운 것들이 으레 그렇듯, 그 풍경은 힘이 셌다. 자연에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어 인간은 그 압력에 짓눌리면서도 자꾸만 그를 향해 손을 뻗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이곳에서 알았다. 그건 수백만 년 이상 엄숙하게 존재해 온 무언가만이 지닐 수 있는 저력인 동시에, 인간의 혼을 이 잠정적인 장소에 보류시키고 마는 장력이었다.

창밖으로 생 마틴 탑이 보인다

산속의 작은 피난처가 일으킨 후유증은 상당했다. 그날 이후, 웬만한 풍경을 보고서는 감탄하기 어려워졌다. 웬만한 치즈도 그때의 치즈보다 못하다. 감흥의 역치가 올라간 탓에 본의 아니게 무던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피난(避難), 말 그대로 어려움을 피해 간다는 뜻인데, 서울에서의 나는 이렇게 또 다른 어려움에 맞서 있다. 앞으로 도대체 어떤 풍경을 봐야 그때만큼의 경이를 느낄 수 있을까. 피난을 위한 피난을 또 떠나야 하는, 여행기자의 아이러니가 시작된 거다.

하산할 때의 풍경. 지상과 가까워질수록 초록이 짙어진다

*세계를 상대로 펼치는 '숨은 장소 찾기'. 곽서희 기자의 히든 스폿에서는 블로그 리뷰도, 구글맵 평점도 드문, 전 세계 숨은 스폿들을 찾아냅니다. 지도 위,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가 빼곡해질 그날까지!

글·사진 곽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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