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의 품격 "참 웅숭깊구나"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의 ‘내가 읽은 이 시를’
한분옥 시인의 ‘뒷북’
문명의 속도 한 걸음 뒤
시조의 품격 지닌 여유
한분옥의 '뒷북'
풋낸가 새물낸가 암내 살내 그도 아닌
푹 삭은 곤쟁이젓 생이젓 그도 아닌
차라리 얼간 돔배기 걸싸게나 씹을거나
앉은일 선일 두고 이제 와 무슨 뒷북
엊저녁 풋잠에 든 얼간이 오사리 놈
저 풀 센 다듬잇살 당겨 스룬다면 스루지
시퍼런 많은 날들 바람 등에 업혀서라도
하룻밤을 못 넘길까 언약도 말도 두고
뼈마디 녹아난다 한들 집채만 한 울음을
「두레문학」 27호, 2020.
단형시조 3수가 모인 시조 「뒷북」은 나날이 훼손되고 있는 시조의 품격을 제대로 지키고 있어 인상 깊게 읽었다. 오늘날 크게 유행하고 있는 엇시조나 사설시조도 보면 어떤 것은 이게 시조라는 생각이 안 들고 이건 시조가 아닌데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자칫하면 시조도 아니고 현대시도 아닌 어정쩡한 작품을 시조라고 발표할 수 있는데 「뒷북」은 현대시조의 모범작으로 거론할 만하다.
제목 '뒷북'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일이 끝난 다음에 뒤늦게 쓸데없이 수선을 피우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뒷북치다'란 말을 쓰고 있다. 한 편의 시조 속에 이렇게 많은 순우리말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던가. 특히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스루다(활용형 스룬다)란 낱말을 썼다는 것이다.
스루다는 쇠붙이를 불에 달궈 무르게 하다, 풀이 센 빨래를 잡아당겨 풀기를 죽이다, 마음이나 속을 태우다는 세 가지 뜻이 있는데 이 가운데 두번째 뜻을 취한 게 아닌가 한다. 시인이 가려 쓴 순우리말의 낱말 풀이를 먼저 해본다.
풋내: 새로 나온 푸성귀나 풋나물의 냄새.
새물내: 빨래 후 갓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
암내: 발정기의 암컷의 몸에서 나는 냄새.
곤쟁이: 보리새우와 비슷하게 생겼고 몸이 작고 연하다. 곤쟁이로 만든 젓이 곤쟁이젓.
생이: 갑각류 새뱅이과의 한 종으로 토하라고도 함. 생이로 만든 젓이 생이젓.
얼간: 소금을 약간 뿌려 조금 절인 간.
돔배기: 제사상에 놓는 상어 고기.
걸싸다: 동작이 몹시 재빠르다.
앉은일: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 ↔ 선일.
오사리: 이른 철의 사리에 잡힌 새우. 잡것이 많이 섞여 있음.
오사리(잡)놈: 온갖 못된 짓을 거침없이 하는 잡놈.
다듬잇살: 다듬이질이 알맞게 되었을 때 다듬잇감에 생기는 풀기나 윤기.
한편의 시조를 읽는 동안 이렇게 많은 우리말 공부를 했다. 그 어떤 존재가 화자에게 이런저런 냄새를 풍기는 것도 아닌, 이런저런 젓갈도 아닌 것을, "차라리 얼간 돔배기(를) 걸싸게나" 씹게 한다. 일단 여기서 한 장이 끝난다.
그 어떤 존재는 또 앉은일 선일 두고 이제 와서야 뒷북을 치게 한다. 때늦게끔 말이다. "엊저녁 풋잠에 든 얼간이 오사리 놈"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 풀 센 다듬잇살(을) 당겨 스룬다면 스루지"도 뒷북치는 것과 연결된다. 왜 용기를 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못했는가 후회막급이다.
세번째 수에 가서 앞 두 수에서 보여준 망설임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 곡진한 내 언약을, 진심어린 내 말을 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고 들이다가 마침내 집채만 한 울음을 터뜨린다. 뼈마디가 녹아나는 내 고백을 너는 알아들었는가. 화자가 타자에게 말한다. 시인이 독자에게 말한다. 정말 알아들었느냐고.
이 시조는 고졸한 시조의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구태의연하거나 고색창연하지 않고 독자에게 생각할 시간을 줌으로써 무언의 대화가 이뤄지게 한다. 문명의 속도는 속전속결이지만 문학은 그 속도전에 편승할 것이 아니라 유유자적하거나 관망하는 태도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뼈마디 녹아난다 한들 집채만 한 울음을"에 이르는 과정이 참으로 웅숭깊어(생각이나 뜻이 크고 넓어) 이 작품이 시조다워졌다.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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