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 이겨내고 학전 부활하길” 벌써 그리운 ‘뒷것 김민기’의 순수[어제TV]

서유나 2024. 5. 6.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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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캡처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캡처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캡처

[뉴스엔 서유나 기자]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가수 겸 작곡가 김민기의 이야기들이 공개됐다.

5월 5일 방송된 SBS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에서는 33년 만에 폐관한 대학로의 상징 소극장 학전을 설립한 대표이자 '아침 이슬'의 작곡가 김민기의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사회적 헌신이 조명됐다.

유신정권이 들어선 1972년 유신 반대를 외치던 시민들이 '아침이슬'을 불렀다는 이유로 정권에 찍혀 '금지곡 가수'가 된 김민기는 완전히 벼랑 끝에 몰렸다. 심지어 보안사 분소에 잡혀가 맞기도 했다고.

결국 김민기는 어머니의 '몇 년 가만히 살자. 너 죽는 꼴 보기 싫다'는 말에 따라 모두와 연락을 끊고 민간인 통제구역인 경기도 연천군 미사면으로 들어갔다. 음악을 접고 농부가 된 것. 김민기의 지인들은 당시 "연락이 안 되니까 김민기가 잡혀가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져야 하는 분위기니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미사면의 마을 주민들은 "우리는 (노래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그랬는데 '중앙여성' 잡지책인가. 거기에 김민기가 나왔길래 '농사지을 사람이 아닌데 왜 농사짓는다고 왔어요?'라고 하니까 '아니에요. 그거 거짓부렁이에요'라고 하더라", "사람이 참 좋아 여기 동네 사람들이 다 좋아했다"고 떠올렸다. 김민기가 동네 아이들 공부를 가르쳐주고, 행사 때마다 사진을 찍어줬다는 일화들도 뒤따랐다.

김민기의 이런 어린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은 목동이 된 1973년의 신정동, 김민기는 이곳에서 대학교 선후배들과 함께 중학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치는 야간학교를 열었다. 전 S전자 사장 이인용, 전 금융그룹 회장 김한, 전 경찰총장 김준규도 야간학교 '신정야학'의 멤버였다. 이들은 의무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집안의 보탬이 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에게 꿈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

김준규는 "신정야학의 특징은 순수했다. 민기 선배도 순수하게 만들었고 운영도 순수하게 했고, 온 사람들도 순수한 사람들이다. '김민기 선배가 하는 거야?'라고 하면서 간 거다. 그때 김민기 선배는 영웅같은 분이니까"라고 말했다.

김한과 이인용은 교사들이 직접 만든 영어 교과서에 '나는 노동자, 당신은 사장'(I'm a laborer, You are a owner)이라는 문장이 들어가자 계급을 가르치면 안 된다며 김민기가 문제를 지적했던 일화도 전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해줬다. 저항의 상징처럼 돼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조금 더 좋은 세상, 따뜻한 세상'이라는 생각을 가지셨던 분. '상록수'랑 딱 맞는 것 같다"고 자신들이 옆에서 보고 느낀 김민기에 대해 전했다.

하지만 김민기는 야학 교사 일을 금방 관둘 수밖에 없었다. 김민기를 감시하려 쫓아다니는 경찰, 정보요원에 함께 일하던 교사들이 일을 관둬달라고 부탁했던 것. 그럼에도 김민기는 이후로도 꾸준히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가졌다.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정병호는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극소수의 상류층 아이들만 갈 수 있던 시기, 달동네 어린이들을 위한 '해송유아원' 설립을 계획하며 농부가 된 김민기를 찾아가 유아원 건립 모금 공연을 부탁했던 일을 언급했다.

이에 김민기는 12.12 군사반란이 터진 직후라 '금지곡 가수'로서 공연을 한다는 게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서도 몇 년 간 놓았던 기타를 잡았고, 공연 강행 끝에 약 300만 원의 모금액을 모았다. 구반포의 18평 아파트가 240만 원 하던 때였다. 결국 공공 육아 목적으로 해송유아원이 최초 설립될 수 있었고 김민기는 쌀농사를 지어 이를 유아원에 매번 기증하며 꾸준히 관심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김민기의 농사꾼의 삶이 집에 원인 모를 불이 나며 끝이 났다. 미사면을 떠나 서울로 돌아간 김민기 1987년 전두환이 물러나며 15년 만에 음악가로서의 이름을 되찾았다. 그리고 1991년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젊은 예술인들에게 기회를 줄 목적으로 '학전'을 개관, 2004년을 기점으로 어린이 무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는 수익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행보였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 아동극이 있는 날은 꼭 객석에 내려왔다는 김민기. '학전'의 관계자는 "선생님이 늘 말씀하신 게 '어린이들을 위해서 하는 일에 상업적인 가치를 두고 싶지 않다'였다. 그래서 '학전'의 티켓값은 어린이 뮤지컬에 비하면 턱없이 낮다. 티켓값을 올리기만 하면 선생님이 화를 많이 내시고 '올리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학전'의 철거일 '학전' 출신 배우들은 '학전'의 이름이 내려가는 걸 눈물과 함께 바라봤다. 그러곤 "학전이라는 소극장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생각 못 했다. 다들 뭐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부활을 염원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황정민, 이정은도 "학전을 거쳐간 좋은 배우들이 있기에 학전의 정신은 늘 살아있을 것 같다", "선생님의 작품을 계속될 거라고 확신한다"고 공감했다.

무엇보다 김민기와 아동극의 시작을 같이하며 그의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을 가장 옆에서 지켜 본 '학전' 출신 배우 김은영은 "꼭 잘 이겨내셔서 저희들 곁에 아버지로서 오래오래 같이 갔으면 좋겠습니다"며 암 투병 중인 김민기의 쾌유를 바라 뭉클함을 자아냈다.

한편 가수 겸 공연연출가 김민기는 현재 암 투병 중이다. 김민기가 운영하던 소극장 '학전'은 재정난과 그의 건강 악화로 개관 33년 만인 지난 3월 15일 폐관했다. 폐관에 앞서 50여 명의 배우, 가수, 예술인들이 자발적으로 '학전, 어게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관심과 응원을 보냈으나 김민기의 뜻에 의해 끝내 문을 닫았다.

뉴스엔 서유나 stranger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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