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혜안 없는 리더를 뽑은 뼈아픈 대가

이남석 발행인 2024. 5. 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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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66
조선 수군 유일한 패배 칠천량 해전
판옥선 오르는 왜군 당해내지 못해
장검 휘두르는 왜군 앞 속수무책
이순신 없는 조선 수군의 몰살
지도자의 전략 부재가 부른 패배

칠천량 해전. 1597년 7월 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에서 열린 해전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기도 하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조선 판옥선에 올라타 '긴 칼'을 휘두른 왜군을 감당하지 못한 탓이 크다. 평소에 길고 큰 칼을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이순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굴욕의 역사가 바뀌었을지 모른다. 다른 한편으론 혜안 없는 이를 이순신의 자리에 앉힌 뼈아픈 대가이기도 하다.

현명한 리더는 예측하기 힘든 미래를 대비해 전략을 짠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밤이 되자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협 입구 양쪽에 척후선을 배치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척후선 병사들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들은 알몸으로 입에 칼을 물고 소리 없이 다가온 왜적 정탐선의 병사들에게 습격을 받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척후선도 모두 불타버렸다.

놀란 조선 수군은 이후 10여척의 판옥선을 내세워 경계를 섰다. 7월 16일 새벽. 서쪽 하늘 구름이 달을 삼키자, 어둠은 더욱 깊어졌다. 이때 부전수가, 협판안치, 소서행장, 가등청정, 장종아부원친 등이 이끄는 대규모 왜적 함선들이 몰려와 포위망을 형성했다.

"저저, 적이닷!" 경상우수사 배설의 군관이 희미한 달빛 아래로 시커먼 물체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가느다란 탄식을 내뱉었다. 뱃멀미로 갑판에 누워있던 배설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두려운 마음에 원균에게 보고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도 없었다. 배설은 원균의 핵심 라인, 이른바 '원핵관'이었지만 인물 됨됨이가 원래 그랬다. 결국 배설은 판옥선 10척을 재촉해 재빨리 한산도 쪽으로 빠져나갔다. 도망친 배설은 정유재란 이후 사형으로 다스려졌다.

배설 함대와는 달리 포구 안쪽에 정박해있던 원균 함대는 적의 기습이 시작됐는데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마침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물이 더 차올라야 판옥선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었다. 이 상황에서 적의 기습을 당한 것이다.

선봉으로 나선 적의 중소형 군함(세키부네)가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포를 쏴라!" "활을 쏴라!" "노를 저어라!" "거북선을 내보내라!" 조선의 주력함대 장수들의 황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왜군이 순식간에 판옥선에 올라타면서 단병전(육박전)이 벌어졌다. 긴 칼을 휘두르는 왜군 병사들에게 조선 병사들은 적수가 되지 못했다. 육박전에 유리한 긴 칼을 사용하는 조선 병사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투 초반부터 조선 수군의 전열이 급격하게 무너져버렸다. 제대로 싸울 수가 없으니, 살길을 찾아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는 전략 부재에서 비롯됐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육지로 도망쳤던 조선 병사들은 매복한 적군에게 몰살하다시피 했다. 왜적은 야간기습에 앞서 이틀에 걸쳐 인근 해안가 곳곳에 매복 병력을 배치해놓았다. 임진왜란 당시 가는 곳마다 이순신에게 쓰라린 패배를 당했던 아픔을 설욕하기 왜군이 4년에 걸쳐 준비한 야간기습 전술에 이은 등선육박전, 매복을 이용한 수륙합동작전은 그대로 적중했다.

전투 초반부터 아군의 전열이 무너진 것은 이순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경계실패 등은 차치하고 육박전만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광화문뿐만 아니라 그 어떤 곳의 이순신 동상을 보면, 장검을 옆에 차고 있다.

기골이 워낙 장대했던 만큼 원래부터 그만큼 큰 칼을 지니고 다녔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더 깊은 까닭이 있다. 왜적과 대등한 육박전을 펼치려면 조선 수군에게도 긴 칼이 필요했다. 이를 감안해 이순신은 장검을 많이 만들 것을 독려해왔다.

이순신은 '삼척서천三尺誓天 산하동색山河動色(삼척장검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벌벌 떤다)'이란 글이 새겨진 칼을 견본으로 삼았다. 이렇게 제작된 칼을 군사들이 잘 사용할 수 있도록 검술도 가르쳐왔다. 원균은 달랐다. 군관 이하의 병졸에게는 아예 칼을 차고 다니지 못하도록 했다. 특히 이순신의 지시로 만들어진 긴 칼은 쓸모없다고 무시했다. 당연히 육박전의 결과는 처참했고, 전열도 급속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격렬하게 버틴 장졸도 많았다.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은 최후까지 남아 싸웠다. 마침 조수도 많이 밀려와 판옥선들의 기동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한꺼번에 움직이다 보니 서로 충돌하며 판옥선들이 둥실둥실 떠돌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이억기의 함대는 악착같이 싸우며 돌파구를 열어갔다. 적의 선봉 함대를 헤치고 칠천량 해협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이번엔 적의 대형 전투선인 아타케부네 전투선들이 주축이 된 대규모 함대가 나타났다. 중·소선까지 포함하면 어림잡아 1000여척에 달했다.

이억기 함대를 겹겹이 둘러싼 적의 전투선들이 일제히 포탄을 퍼붓자, 병사들은 거의 다 죽었다. 이억기는 비범한 장수였다. 함선에서 적들과 싸워 10여명을 해치웠다. 하지만 깊은 창상을 입고 버틸 수 없자 그는 "어찌 왜놈 칼날에 절명하랴"며 스스로 바닷물에 몸을 던져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마치 용왕이 데려간 듯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위기의 행주산성에 활을 실어 날랐던 충청수사 최호도 처절하게 싸우다 결국 전사했다. 이순신 휘하의 명장이던 이영남도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다 죽었다. 이운룡, 기효근, 이언량, 진무성 등은 완강하게 버티면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전공을 세웠던 조방장 김완은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져 결국 포로로 끌려갔다. 이후 탈출에 성공하면서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일부 용감한 전사들의 혈전에 힘입어 칠천량에서 탈출한 조선 수군 일부는 거제도 인근 가조도, 통영의 춘원포 등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추격해 온 왜적에게 결국 처참하게 당하고 말았다.

원균은 대장선인 판옥누선을 타고 가까스로 춘원포로 도망쳐왔지만, 사방에 깔린 적의 함선들을 보고 오금이 저렸다. 다급한 나머지 바닷물에 뛰어들었다. 수군 총사령관의 이같은 모습에 함께 타고 있던 장졸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배에서 뛰어내렸다. 노련한 수군 한명이 마지막으로 남아 대장선에 불을 지르고 나서야 물에 뛰어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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