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안정적인 길을 버리고 한국에 온 이유는?

장슬기 기자 2024. 5. 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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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첫 시집 '빈집에서 겨울나기' 낸 작가 전은주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 작가 전은주. 사진=전은주

작가 전은주. 지난 2월 첫 시집 '빈집에서 겨울나기'를 냈고 현재 연세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 3월21일, 미디어오늘은 그를 서울 2호선 대림역 12번 출구 앞에서 만났다.

전 작가는 기자가 과거 '다문화'에 대해 쓴 글을 언급했다. '다문화'라는 말은 한국문화를 '단일문화'로 상정한 뒤 타국의 문화를 정의한 개념으로 '다문화'란 말이 한국보다 경제 수준이 낮은 나라에서 온 '이주 아동'을 비하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담은 내용이다. 이에 기자는 '다문화' 대신 '상호문화', '다문화 가정' 대신 '이주배경 가정'로 대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기자에게 “한국인이 '다문화 가정' 대신 '이주배경 가정'을 쓰자고 제안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고 공감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그러한 주장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온 이주민들이 그러한 주장을 한다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비난만 돌아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한국 태생의 기자는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온 작가와 같은 언어로 글을 쓰는 '동포'라는 공감대를 형성하자마자 서로 말할 수 있는 내용이 다르다는 '간격'을 느꼈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한국계 중국인(조선족) 출신 작가의 기사가 나가는 것에 부담을 슬며시 나타낸 마음도 이해가 됐다. 이에 총선의 열기가 다소 가라앉은 5월에서야 인터뷰 내용을 꺼냈다.

작가 전은주는 2012년 연변대 조문학부와 숭실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2019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2008년 '창작21'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지난 2021년 '돌개바람'이란 작품으로 박두진문학상 제1회 아시아시선상을 받았다.

'돌개바람'은 “어느 마을에 가도/ 혼자 잠들지 못하는/ 빈집이 있다.”로 시작한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북간도 연변 땅에서부터 한국 땅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아픔이나 외로움을 시로 형상화하려 했다”고 말했다. 디아스포라는 본토를 떠나 타지에서 자신들의 규범·관습을 유지하며 사는 민족과 거주지 등을 뜻한다. 중국에서는 탄압받는 소수민족, 한국에서는 혐오의 대상인 '조선족' 작가의 마음은 '빈집'처럼 쓸쓸했을 법하다.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했다.

-첫 시집을 출간했다. 제목에 '빈집'이 등장하면서 전반적으로 쓸쓸한 분위기다. 문학평론가 유성호는 추천사에서 “첫 시집에 담긴 쓸쓸한 아름다움과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서정적 기품에 한없는 응원을 보낸다”고 했다.

“2013년에 연대에 입학했는데 3월1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병간호하느라 석사 끝나고 바로 학교에 오지 못하다 3월 2주차부터 학교에 왔다. 아버지를 보내고 고향을 떠나서 공부를 하다보니 허전했다. '빈집'은 아버지이기도 하고 떠나버린 고향, 내가 두고 온 연변, 조선족 등 다양한 의미다.”

-'아버지'라는 시에서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지만/ 강물 속에서는/ 전혀 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시가 많은데 항암치료를 하는 이야기도 나오고, 그리움이 커보인다.

“아버지는 소아마비, 다리에 장애가 있었는데 물에서 헤엄칠 때는 장애가 드러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몇 년 간 내가 무릎이 아파서 약을 먹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심해졌다. 내가 무릎이 아플 때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어떤 쪽 다리에 장애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같이 살았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보지 않으면서 살았던 거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하교길에 눈이 많이 내린 날이 있다. 아버지가 저기서 걸어오는데 눈길에 넘어졌다. 그게 너무 창피했다. 사실 아버지는 딸과 딸의 친구들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무릎 통증'이란 시를 보면 “벌렁 넘어진 그 부끄러움,/ 참을 수 없던 기억!/ 절름거리며 걸었던/ 아픈 세월의 그 수치심을,/ 무릎에다 숨기고/ 날 벌주고 있었구나,/ 아버지!”라는 부분이 나온다.

“무릎 통증으로 울다 깨어난 날 새벽, 뒷통수를 때리듯 그날의 기억이 살아났다. 그 순간 눈물이 쏟아졌다. 내 부끄러움보다 더 컸을 아비저의 수치심도 생생하게 실감났다. 아파보니 나와 아버지의 입장이 함께 떠올랐고 이후에 내 무릎 통증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버지와 장애에 대한 트라우마를 발견하면서 '빈집에서 겨울나기'가 끝났다.”

-'대림동 12번 출구'라는 시도 인상적이다. “화장실이 없는/ 대림동 반지하 쪽방./ 새벽마다 오줌을 참으며,/ 녹음 파일의 노래 속으로/ 꿈속처럼 파고든다./ 대림역 전철 12번 출구/ 그 화장실까지/ 사백 걸음을 가면서도/ 생각은 언제나/ 바다의 품으로 달려간다./ 사랑이여!”

“대림동·가리봉동 집값이 저렴해 조선족들이 모여 살았다. 대부분 방을 개조해 누울 수 있는 정도 공간만 있고 화장실은 없어 대림역 화장실에 새벽마다 줄을 섰다. 요즘은 다시 가보니 반지하도 사라졌다고 하고 화장실도 생겼는데 집값이 비싸져 조선족이 대림동을 떠나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 내가 알던 대림동이 아니다. 특색있는 문화거리 정도로 바뀌면서 상가들만 들어서면서 삶도 바뀌었겠다 싶다.”

-연변대에서 공부했으면 중국에서 안정적으로 살았을 텐데, 한국엔 어쩌다 오게 됐나?

“대학원 갈 때 고민했다. 연변에서 친구와 같이 교수를 목표로 공부를 했다. 연변에서 박사를 받으면 안정적이다. 한국에 오면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숭실대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한국에서 목표가 생겼다. 울타리를 벗어나 모험을 해보고 싶었다.”

-연변과 서울에서 공부할 때 어떠한 차이가 있나?

“서울에선 자유롭다. 연변에선 수강신청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교수들이 정해준 교재가 있고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한국에 오니 문학사를 서술하는 교수에 따라 문학사 기준이 달라지는데 놀랐다. 민주주의가 이런 건가 싶었다. 친구들은 '왜 힘들게 학위 받고 연변에 돌아가지 않고 이방인으로 한국에 남으려고 하냐'고 하는데 농담 삼아 '개척자 정신이 있는 조선족 DNA가 강해서 그렇다'고 답한다.”

-학계 분위기가 전혀 다른 만큼 언론계도 다를 것 같다. 한국에선 최근 언론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분위기인데 연변에서 언론인의 인기는 어떤가?

“위상이 높다. 언론이 누굴 대변하는가가 중요하지 않나. 평범한 국민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당과 정부를 대변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언론인에게 잘 보이려고 한다.”

-연변에서는 한국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한중수교 이전엔 한국을 상상만 했다. 이북에서 건너온 후손이 더 많겠지만 우리 동네(도문시 량수진 량수촌)에서 산 하나만 건너면 '충청도마을'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기차에 실려 충청도의 한 마을 전체가 이동된 거다. 수교 이후 그 동네에서 청주아리랑을 보존하고 있어서 한국 학자들이 와서 연구해갔다. 한국은 부모로부터 듣는 상상 속의 모국이었다.”

-한국에선 조선족들을 그 정도로 반기진 않았을 텐데.

“조선족들이 처음 한국에 올 때는 친척, 혈육을 찾는 느낌으로 상상 속 모국에 온다. 아무리 친척이라 해도 처음 만났을 때 반갑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가시지 않겠나. 게다가 가난한 친척이다. 중국에는 한족 빼고 55개 민족이 있다고 하는데 자기만의 언어, 출판사, 대학을 가진 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조선족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굉장하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 이주해와서 연변에 한국을 닮은 자신들만의 고향을 만들었고 지켜왔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얼마 전에도 애인을 사귈 때도 조선족은 조선족끼리 만나고 한족을 만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한국이 소위 '우리집'인 줄 알고 왔는데 체제도 다르다 보니 충돌이 생기면서 '낯선 모국'이 됐다. 개혁·개방하면서 연변 사람들도 연변을 떠나기 시작해 거기도 '빈집'이다.”

▲ 빈집에서 겨울나기/ 전은주 지음/ 천년의시작 펴냄

중국 정부는 조선족을 포함해 소수민족에게 불리한 정책을 펴고 있다. 지난해 12월 조선일보 보도를 보면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 교육당국이 중국어 교육을 강화해 현지 소수민족인 몽골족이 반발하는 가운데 조선족 학교들도 국어 교재를 한글 설명 대신 중국의 통일 교재로 바꾸기로 했다. 일각에서는 교과서 변경으로 중국 대입에서 조선어 시험이 앞으로 없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고 전했다.

지난해에는 연변자치주 룽징시에 위치한 시인 윤동주 생가를 4개월간 폐쇄하기도 했다. 수리 목적이라고 밝혔지만 공사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이 전해졌고, '위험주택 접근금지'라는 문구가 그대로 남아있고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으로 표기해 논란이 됐다.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쓰는 공식 명칭이다. 한국에서는 조선족이라고도 하고 중국동포, 한국계 중국인이라고도 한다. 두 단어를 듣는 심정이 다를 것 같다.

“미디어에서 좋은 이야기를 다룰 때는 동포라고 하고 안 좋은 사건사고에서는 조선족으로 표현한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대선이나 총선을 앞두고 조선족 관련 기사가 증가했다가 지나면 사라지기도 하고. 조선족이란 용어는 연변에서 우리 자부심의 대명사였는데 한국에선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조선족이라고 쓰든 동포라고 쓰든 상관없지만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서 부르진 않았으면 좋겠다.”

-조선족이 보이스피싱 범죄의 대명사가 됐고, 예능에서도 희화화하는 경우가 있다.

“역지사지를 해보면 반쯤은 해결될 것 같다. 한국인도 한국을 벗어나는 순간 이방인이 되지 않나. 나는 조선족 출신이기에 어떠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설득이 아니라 항변·변명이 되기 때문에 이 정도의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과거 대림동을 부정적으로 다룬 영화들이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반대로 인상 깊게 본 영화는 무엇이 있나?

“암살, 밀정, 동주, 박열 등의 영화나 미스터 션샤인'과 같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애국심·민족의식도 생기지만 만주를 배경으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다룬 영화라서다. 다만 이러한 영화를 다루면서 조선족의 이야기를 아주 조금만 부연해주면 훨씬 역사 인식을 제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영화 봉오동전투에서도 배경 설명으로 조금만 (조선족에 대한) 설명이 있으면 좋겠다.”

다음은 재한동포문인협회 동인지 '동포문학' 9호에 박춘혁 시인의 <윤동주가 부럽다>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도/ 자기 사람이라 반기고/ 저기서도 / 자기 사람이라 모시니/ 시라도 한 번 잘 쓰자/ 태어난 곳이 무슨 상관이랴/ 오늘 밤 달은 둥글다”

-한국에서는 윤동주를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으로 배우는데 그가 뛰어난 시인이기에 중국에서도 중국 사람이라고 주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를 보는 박춘혁 시인이 한국과 중국에서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조선족의 처지를 대비한 대목은 한국인이 성찰할 부분이기도 하다.

“조선족 입장에서는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는데 개선할 필요도 있다. 한국의 미디어에서 조선족에 대한 차별이 있고, 사실 어디에서나 이주민에 대한 차별이 있다. 그 안에만 갇혀있을 게 아니라 힘을 키우고 피해의식을 극복해야 한다. 한 순댓국집에서 내가 봤던 사례로 예를 들면, 한 손님이 양념장을 더 달라고 했는데 주인이 다 떨어졌다며 미안해하며 다른 반찬을 더 갖다줬다. 그런데 그 손님이 한숨을 쉬면서 '조선족이라고 안 주네'라고 말하더라. 당시 나는 조선족이란 사실에 자부심으로 느끼며 한국에 공부하러 왔을 때였는데 한국의 조선족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왜 말도 안 되는 자책을 할까, 자격지심을 지녔을까. 한편으로는 분노했지만 생각할수록 안쓰러웠다.”

-한국인이 조선족에게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피해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한국에 온 조선족 시민들과 어떻게 소통하나?

“한중수교 이후 조선족들이 열심히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10년, 20년 지나고 보니 물질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결핍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문학을 통한 치유 프로그램을 찾고 있다. 한국인과 조선족을 비교하면 한국인들은 괴로우면 뭐라도 해서 그 마음을 날려버리는데 조선족은 백이면 백 모두 인내하려 한다. 그래서 시를 통해 트라우마를 이야기하고 피해의식을 없애기 위한 '시 치료' 수업을 한다.”

-대학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는데 수업에서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있나?

“요즘은 챗GPT가 글도 써준다. 이제 기술적인 글쓰기도 기본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우리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거나 자기성찰까지 도와주진 않는다.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런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소개서를 쓸 때도 자기 서사가 드러나도록 쓰자고 한다.”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나?

“결국 빈집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집이다. 자신이 비어 있다면 어디에서 살아도 우리는 빈집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인식을 늘 변화시켜 나가 가족들이 화해와 소통이 가득찬 아름다운 집을 지어야 한다. 성찰을 통해 나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시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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